벌초 간 어머니 묘에 커다랗게 구멍이 뚫려 있다 검게 아가리 벌린 그 구멍은 죽음에 뚫은 문, 산토끼의 집이다 하필이면 왜 그곳에 제 집을 판 것일까 젖가슴처럼 봉곳한 봉분을 파고들며 토끼는 아찔하게 검은 젖을 빨았을까 구멍을 드나든다고 죽음이 달라지는 건 아니겠지만, 어머니가 다시 돌아오시는 건 더욱 아니겠지만, 죽음과 삶이 한통속, 바람벽에 달아놓은 거울처럼 구멍이 갑자기 환하다 입구에는 누군가 기다리다 돌아간 듯 잔디가 동그랗게 눌려 있다
추석입니다. 벌초 가시는 분들 많겠죠? 아님 그냥 성묘라도요. 이번 성묘 때 저는 어디 구멍이 없나 유심히 살펴볼 것 같습니다. 꼭 제 가족의 무덤이 아니라도 좋겠습니다. 산토끼굴이 아니라 다람쥐굴이나 개미굴이라도 좋겠습니다.
무덤에 뚫린 커다란 구멍. 저승으로 향하는 어두운 통로일 것만 같은데 그게 하필 토끼굴이라니. 어머니 젖무덤을 파고들듯 작은 토끼들이 무덤을 파고들어 쌔근쌔근 잠든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사람의 혼령과 산토끼의 따스한 몸이 오순도순 한 집에 사는 모습도 상상해 봅니다. 귀신 들린 집은 그저 무서운데, 생명이 비집고 들어선 무덤은 이렇게나 환합니다. 죽음이 삶을 보듬어 안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후에도 작고 어린 것들을 돌보시나 봅니다.
우리는 추석이 되어서야 "죽음과 삶이 한통속"임을 겨우 되새기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햅쌀과 햇과일로 죽음을 돌보면서 말이죠. 요즘에는 제 손으로 추수를 하고 과일을 따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한 해 농사를 도와주신 데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조상님께 첫물을 바친다는 건 그야말로 먼 나라 이야기만 같아요. 하지만 논밭과 과수원에만 혼령의 기운이 깃드는 것이겠습니까. 돌아가신 어머니의 무덤이 토끼들을 품듯 아파트에서도 공장에서도 늘상 죽음은 삶을 돌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무덤에 뚫린 토끼굴의 입구가 "바람벽에 달아놓은 거울"처럼 환할 수 있는 건 그 때문이 아닐까요? 낮이라면 그 거울에 우리의 삶이 슬몃 비치기도 할 테지요. 밤에는요? "죽음과 삶이 한통속"으로 이어지는 입구에 팔월 한가위의 달빛이 스밀 겁니다. 은은하게 환할 겁니다.
신해욱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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