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재임 시 특별보좌관과 국무장관으로 임명했던 헨리 키신저(사진)를 "초인적인 일을 해낸 인물"로 자신의 회고록에서 묘사했다. 중국이란 '죽의 장막'을 걷어낸 외교의 마술사로 불리는 키신저가 실은 칠레의 군사 쿠데타를 기획하고 사주한 장본인이란 사실이 미국 정부 문서에서 드러났다. 조지 워싱턴대 부설 국가안보문서연구소는 칠레 군사 쿠데타 발발 40주년인 11일(현지시간) 정부 문서를 인용해 "키신저가 닉슨에게 민주적 선거로 당선된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전복시킬 것을 강력히 설득했다"며 "그 이유는 (아옌데의) 도덕적 효과가 (남미에)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1970년 남미 최초로 선거로 당선된 아옌데 사회주의 정권은 집권 초반부터 닉슨 정부와 갈등을 빚어야 했다. 결국 3년 뒤인 73년 닉슨 정부가 지원한 군부 쿠데타가 성공하면서 아옌데는 비극적 죽음을 맞이했고, 칠레는 90년 초까지 쿠데타를 이끈 아우그스토 피노체트 육군 총사령관의 독재에 시달려야 했다.
전화녹음을 포함, 이번에 공개된 기록에서 키신저는 칠레 군사 쿠데타를 입안하고 감독까지 한 것으로 나타났다. 칠레의 9ㆍ11로 불리는 이 쿠데타가 성공하자 키신저는 닉슨에게 "미국이 쿠데타를 도왔다. 이는 (미국에) 최선의 조건을 만들어냈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닉슨이 "미국 언론들이 아옌데 정권의 전복을 우려하고 있다"고 불평하자, 키신저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대였다면 우리는 영웅이 됐을 것"이란 말로 위로했다.
키신저는 쿠데타 3년 뒤 피노체트에게 "우리는 당신을 흔들기 보다 지원하고자 한다"면서 "당신은 아옌데 정권을 붕괴시켜 서방 진영에 엄청난 공헌을 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연구소 측은 이번 자료가 40년 전 칠레 독재정권의 등장과 민주주의의 종언에 관여한 키신저의 역사적 책임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평가했다.
워싱턴=이태규특파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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