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이 올 때까지 눈 감을 수 없어요. 너무 보고파서…." 귀에 익지 않은, 거칠기까지 한 목소리지만 기성 가수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절절함이 배어난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최광철(53). 1998년 클린턴 미 대통령의 방한 당시 그 앞에서 색소폰을 연주, 예사롭지 않은 인생 여정과 함께 화제가 됐던 사람이다. 이번에 가수로 변신, 자작곡'이제는 만나야 한다'를 직접 불러 2집 앨범 '최광철의 색소폰 연가(戀歌)'를 발표했다. 물론 재즈 연주곡도 12편 실려 있다.(오렌지 음반)
최씨는"곧 세상을 뜨실 이산 가족 어르신들을 생각 해 지은 곡"이라고 말했다. 97년 이산 가족 특집 프로를 통해 세상과 처음으로 대면했으나, 허구한 날 냉온을 오가는 남북 정국에 치여 소멸될 뻔했던 작품이기에 더욱 소중하다. 그는 "정식 음반이 없어 일반과 지속적인 접촉의 기회를 갖지 못한 아픔의 곡"이라며 내친 김에 최근 저작권 등록까지 마친 사연을 설명했다. 일반 대중이 머잖아 노래방에서도 이 곡을 부르게 될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
자작 재즈곡만으로 꾸민 첫 앨범 '재즈 색소'를 발표한 지 17년만의 일이다. 색소폰으로 대금처럼 소리를 꺾는 등 한국적 재즈를 구사하는 재즈 뮤지션으로도 성가 높았던 그가 이산 가족의 통한에 눈 뜬 것은 필연이었다. 그는 37세에 이 곡을 지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울면서 지었어요."
77년 40대의 나이로 숨진 아버지 최병운씨는 실향민의 통한을 한 몸에 지고 살았다. '평양 최부자'로 불리던 집안의 2대 독자였던 부친은 공산 치하에서 집안이 모진 고초를 겪자 1ㆍ4후퇴 때 남하, 다시는 고향땅을 밟지 못하는 처지가 됐다.
유랑 극단에 들어가 막일로 끼니를 이어 가던 선친은 그러나 이북서는 넉넉한 생활 덕에 색소폰을 취미로 불던 멋쟁이였다. 눈 여겨 보던 극단주의 배려로 국극 배우가 된 선친은 남철, 최무룡, 김희갑 등 일류 배우들과 낭랑쇼에 출연할 정도였다. 그러나 선친은 사무치는 향수에 밤낮을 술로 지내더니 폐병을 얻고야 말았다. "법 없이도 살 분이었는데 술만 들어갔다 하면 부잣집 아들로 지내던 때만 회상하는 아버지가 옛날에는 싫기만 했어요."그러나 자신도 운명처럼 색소폰을 불고 재즈를 하면서 인생을 알게 됐다.
그의 색소폰은 그와 세상과 잇는 가교다. 대구와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해 굵직한 행사의 축하 연주자로 활동하며 유지들과 맺은 인연 덕에 각종 직함을 달고 있었던 그였지만 현재의 대외적 얼굴은 오직 하나다. 사단법인 지방분권운동본부 대구ㆍ경북 지역 특위위원장. 그는 "한국 특유의 과도한 중앙 집중 현상은 역대 대통령, 특히 비서진의 오류"라며 "진보ㆍ보수를 떠나 모든 지역이 공감할 수 있는 대국민 홍보에 주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의 무기는 단 하나, 색소폰이다.
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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