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말이 없다. 늘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어머니는 그의 가슴 속에 묻힌 많은 말을 안다. 자식은 모를 말. 죽어도 모를 말. 아버지와의 이별을 준비하는 가족은 그제야 그 품속의 말을 알아채고 슬피 운다. 아내를 위해 마당에 심었던 매화나무(홍매). 그 옆에 선 채 죽어 귀신이 되어서야 웃어 보이는 사내의 모습은 아버지이고 남편이다.
연극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연출 김철리)는 아파도 아프다 말하지 않고 사랑하면서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는 우리의 아버지, 그리고 곁을 지켜온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이다. 작가 김광탁이 간암 말기의 아버지가 혼수 상태에 빠진 후 "굿을 해달라"고 했던 말에 충격을 받아 쓴 자전적 희곡이다.
말기암으로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둘러싼 어머니와 아들의 일상을 담담하지만 사실적인 묘사로 그린 이 작품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로 나선 배우는 신구와 손숙이다. 두 노배우는 국립극단에서 함께 청춘을 보내고 3년 전 연극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에서 부부로 호흡을 맞춰 사뭇 해로한 '짝'의 분위기를 낸다.
극의 전개는 단출하다. 단신으로 월남해 두 아들을 키운 일흔여덟의 아버지는 간암 말기 선고를 받고 죽을 날을 기다린다. 어머니는 간병을 위해 시골집으로 내려온 둘째 아들 내외와 하루하루 병세가 깊어지는 아버지를 지켜보며 묵은 체증처럼 쌓여온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시간을 가진다. 극을 설명하는 화자는 극중 삼류 연극배우인 둘째가 맡는다. "그 흔한 보험 하나 안 들어놓고 뭐했느냐"고 어머니에게 분통을 터트리고 "우리에겐 너희가 보험이다"는 대답에 속상해하는 흔한 자식이다.
'별이 3개나 붙은'전자회사 부장인 장남만을 극진히 아껴온 부모. 하지만 아버지는 최후를 지키는 둘째에게 달을 함께 보고 아픈 배를 어루만지도록 하는 '마지막 추억'을 건넨다. "할 말이 많은데… "라며 심지에 꼬깃꼬깃 접어뒀던 사랑도 끄집어내 선물로 남기고 떠난다. 아버지는 잠들어 있는 아내에겐 40년 전 마당에 심었던 홍매나무(아내의 이름도 홍매다)의 사연을 들려주며 역시 못했던 말을 전한다. 손숙씨는 이 장면에 대해 "아버지와 아들이 화해하고 서로 모르던 사랑을 발견하는 모습이 가슴 아프다.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회한도 녹아 있다"며 "아버지와 말을 나누지 못하는 자식들이 공감할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극의 마지막 장. 이미 숨을 거둔 아버지가 하얀 정장 차림으로 빨간 홍시를 든 채 아내 앞에 선다. 아버지는 홀로 남은 아내에게 한겨울 지낼 만한 골방을 준비해놨다 말하고 먼 길로 돌아선다. 혼령이 되어서야 속내를 터놓는 부부. 객석은 내내 참았던 눈물을 터트린다.
둘째 아들 내외 역으론 정승길과 서은경이, 이웃 정씨 아저씨 역으로 이호성이 나섰다. 공연은 내달 6일까지 서울 서초동 흰물결아트센터에서 계속된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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