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의 시선으로 한국을 묘사하거나 평가하는 책들을 만날 기회가 많아졌다. 그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책들은 대개 저자가 서양인들이다. 오랜 한국 생활의 풍부한 체험을 녹여내는 이도 있고, 수년이나 짧게는 수개월의 체류에서 받은 인상을 엮어내는 사람도 있다. 경험의 두께를 떠나 그 책들이 읽히는 것은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나고 자란 이들의 시선을 통해 한국인이 '자기 발견'할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대체로 '선진국' 출신인 저자들이 여러모로 발전을 일궜다는 한국을 속으로는 어느 정도 평가하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도 한몫하는지 모른다.
는 40년 넘게 현지조사와 더불어 한국을 연구해온 일본 인류학자가 그 과정에서 보고 느낀 일들을 에세이 형태로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을 읽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일본 사람이 한국에 대해 쓴 책들이 생각보다 없네. 시바 료타로의 같은 책이 얼른 떠오르는 정도다. 과연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
인상적인 것은 수는 적을지 몰라도 이런 일본인 저자들의 책이 흔히 보는 서양인들의 한국에 대한 책에 비해 한국을 이해하는 정도나 글의 깊이에서 한참 앞선 것으로 느껴진다는 점이다. 은 제주도 역사와 문화가 일본 국민작가의 글 솜씨로 잘 꿰어져 있다. 일본 히로시마대, 도호쿠대를 거쳐 서울대(인류학과)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도 가르친 시마 무쓰히코 도호쿠대 명예교수의 책도 관심사나 색채는 다르지만 가치가 그에 못지 않다.
책은 오랫동안 한국의 족보, 호적 연구를 해온 저자가 1970년대 중반 첫 현지조사에 나서 전남 나주 인근 마을에 1년 동안 머물 때 이야기로 시작한다. '공산 양반'댁에 하숙하면서 만난 동네 어른들, 또래 친구들과 겪은 일들은 여전히 강고한 유교적 전통 질서와 초기 산업화, 새마을운동을 통한 농촌 개발 등 변해가는 한국 지역 사회의 풍경과 어울려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그 중에서도 그가 보고 느낀 것을 일본의 문화나 일본인들의 사고 방식과 연관 지어 설명하는 대목들에 특별히 눈길이 간다.
"일본 놈들은 사촌끼리도 결혼한담서? 참말로 비둘기만도 못한 놈들 아니여(비둘기는 근친 교미를 않는단다)" "일본서는 개는 족보가 있는디, 사람 족보는 없담서?"라는 마을 어른들 이야기를 섞어 가며 그는 족보를 '한 사람 한 사람을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사람의 연쇄 속에 위치 짓고 각자가 어떤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가 조선에 강요한 창씨개명은 단순히 이름을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역사를 짊어진 존재로서 각 사람의 근거,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었다고 비판한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살아 돌아온 스물다섯 살 윤택이 그의 방에 놀러 왔을 때 나눈 이야기도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윤택이 이런다. "왜놈들은 진짜로 나쁜 놈들이여. 임진왜란 때는 우리나라 보물을 싹 쓸어갔제. 일제시대에는 왜놈들이 와서 몽땅 가져가브러서 우리는 먹을 것도 ?종駭쨉? 아, 6ㆍ25 때도 일본 놈이 와서 전부 뺏아가브럿다고이. 아, 원래 한자도 우리나라의 왕인 박사가 일본 가서 가르쳐준 거 아니여" 초등학교만 나온 그의 역사 인식은 분명 혼돈스러운 것이지만 저자는 굳이 그것을 비난하거나 교정하려 들지 않았다. 대신 '그의 지식 안에 점점이 존재하는 역사적 사건들이 국가나 사회 전체의 역사 이해와는 다른 차원에서 현재의 윤택이의 삶 속에 살아 있다'고 보면서 '그것들이 구체적으로는 몇 백 년쯤 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의 조상의 계보와 겹쳐져, 그 전부가 현재의 자기 생활을 생각할 때 솟구쳐 온다'고 해석한다.
일본인은'자기 신상에 대해 생각할 때 이렇게까지 역사가 고개를 내미는 일은 거의 없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일본인이 몰역사적이라면 '시간의 깊이가 무시된 채 과거가 현재 속에 동시에 분출하는 윤택이와 많은 한국인들은 평면적이고 비역사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1980년대 초반 대구 인근에서 몇 달 현지조사를 할 때 경험, 그 이후로 족보와 호적 조사를 위해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 이곳 저곳을 다니며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이 인류학자는 이런 메시지도 던진다. 다른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문화에 대한 추상화가 불가피하지만 그 작업은 '실은 몇 겹으로 의미가 부여된 필터를 통과한 '사실'에서마저도 더 멀어져 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그런 가운데 만들어진 전체상이란, 노골적으로 왜곡된 것이 아니더라도, 관찰자의 눈에 비친 부분만이 유독 확대된 그림'일 수 있다. 한일 양국은 물론이고 다른 문화를 이해하려고 할 때 언제나 명심해야 할 말이다.
이런 메시지와 별개로 이 책은 한국을 보는 저자의 정감 어린 시선 때문에 읽어가다 저절로 가슴이 따뜻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다. '이문구의 소설을 읽는 듯한 재미'라는 출판사의 선전이 지나치지 않? 꽤 오래 전에 일본서 나온 이 책을 우연히 도서관에서 발견해 지난 시절 한국인들의 육성을 전라도, 경상도 사투리로 맛깔스럽게 옮긴 번역자의 공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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