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과 외로움 같은 깊고 어두운 감정들은 아이들의 것이 아니라고 어른들은 믿고 싶다. 하지만 이것은 탄생의 순간부터 버젓한 인간의 감정이다. 만날 까불이, 장난꾸러기 아이가 문득 외롭거나 슬퍼 보일 때면 부모의 마음 속엔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불지만, 이것은 기실 안도해야 좋을 일이다. 아이들이 잘 자라고 있다는 증거이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능청과 익살을 놓지 않는 이정록(49) 시인이 4년 만에 두 번째 동시집 를 펴냈다. 살을 빼겠다며 열심히 훌라후프를 돌리는 뚱뚱한 엄마는 "밤 하늘에 떠 있는 토성"이요, "왜 자꾸 틀리니?" 꾸중하는 엄마에게 "어미야, 걔도 틀니니?" 묻는 "할머니는 내 편"이다. 낙천과 해학의 말놀이가 여전하다.
하지만 이번 동시집에서 두드러지는 건 해맑은 웃음기 속에 언뜻언뜻 비치는 속 깊은 아이의 모습이다. 아이는 빨간 신호등 속 정지 아이콘이 불 속에 있는 소방관 아빠 같다는 친구의 말에 초록 신호등 속 보행 아이콘은 "초록 들판에서 땀 닦으며 걸어 나오시는 아버지 같다"고 느낄 만큼 의젓해졌다. 산골짝에서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득두는 "엄마 아빠 어디 가셨어요?" 떼 쓰지 않고, "아침 안개 감아서/ 솜사탕 만들고// 저녁 노을 뭉쳐서/호박엿 만들"며 막대기 하나로 온 종일 논다. 그래도 부모가 보고플 땐 막대기로 오솔길에 편지도 썼다가 신발로 문지르는 아이. "눈물이 나오면/ 막대기만 꺾"는 것은 오히려 아이이고, 읽는 어른 눈에서는 눈물이 핑그르르 돈다.
시, 산문, 동시, 동화를 두루 쓰는 이 시인은 "동시는 다른 글에 비해 맑고 깨끗한 몸에 고이는 것 같다"고 말한다. 뻐근하면서도 뿌듯한 이 '주름진 어린이'의 시는 오랜 교직 생활 덕분일 수도 있다. 표제작 '저 많이 컸죠'를 보자. 이 예쁘고 기특한 녀석을 어쩔까나.
"할머니는/ 싱크대가 자꾸 자라는 것 같다고 합니다./ 장롱도 키가 크는 것 같다고 허리 두드립니다.// 할머니 키가 작아져서 그래…,/ 말하려다가 이불을 펴 드렸습니다./ 허리가 꼬부라져서 그런 거야…,/ 입술 삐죽이다가, 싱크대 찬장/ 높은 칸에 놓인 그릇을/ 아래 칸에 내려놓았습니다.// 우리 손자 많이 컸다고/ 이제 아비만큼 자랐다고 웃습니다./ 쓰다듬기 좋게 얼른 머리를 숙입니다."슬프게도 기쁘게도, 아이들은 자란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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