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친구를 살해한 뒤 낙지를 먹다 질식한 것처럼 꾸며 거액의 보험금을 가로챘다는 이른바 '낙지 살인사건'의 피고인이 12일 무죄를 확정 받았다. 대법원은 "간접증거만으로 살인 혐의를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판단했지만, 유족은 "법을 믿지 못하겠다"며 반발하고 있다. 특히 사건 전후 피고인 김모(32)씨의 석연찮은 변명과 행적 등 숱한 의혹이 고스란히 남아 실체적 진실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무기징역에서 무죄까지
대법원 1부(주심 고영한 대법관)는 이날 여자친구 윤모(당시 21세)씨를 살해하고 보험금을 타낸 혐의(살인 및 사기)로 기소된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지난해 10월 1심 재판부는 김씨가 타월 같은 천으로 술에 취한 윤씨를 질식시켰다고 판단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산낙지를 먹다 질식했다면 고통으로 몸부림쳤을 텐데 자리가 흐트러지지 않은 점 ▦입에서 산낙지를 빼냈다는 김씨의 진술이 자주 바뀌는 점 등이 근거가 됐다. 당시 재판부는 "(김씨가)탐욕으로 살해를 계획했다는 점에서 지극히 비인간적이고 잔혹하다"며 "(법정에서도) 후회나 죄책감을 느끼는 듯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올해 4월 항소심 재판부는 "코와 입을 막아 살해했을 경우 본능적 저항으로 얼굴 등에 상처가 남게 되는데 피해자 몸에 그런 흔적이 있었다거나 저항을 못할 정도로 의식이 없었다는 점이 증명되지 않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살인 혐의가 합리적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입증됐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대법원도 얼굴에 상처 흔적이 없는 점 등을 근거로 "낙지에 의한 질식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보험계약 내용 등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는 김씨의 주장도 무죄 판단의 근거가 됐다.
간접증거로 유죄선고 많은데
사건 발생 당시 경찰은 타살 의혹이 없다고 보고 부검 등 조사를 하지 않았다. 유족도 단순 사고로 믿고 피해자 시신을 화장했다. 뒤늦게 의혹이 제기돼 김씨가 기소됐지만 피고인이나 유족 모두 증언 등 간접증거로만 유무죄를 다퉈야 했다.
법원은 '만삭 의사부인 살인 사건' 등 직접 살인 증거가 없었던 여러 사건에서 간접증거만으로 유죄를 선고한 전례가 있다. 지난 7월 대법원 1부(주심 양창수 대법관)는 동업자를 땅에 묻어 숨지게 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박모(42)씨에게 징역 13년을 선고하며 "간접증거가 개별적으로 완전한 증명력을 갖지 못해도 종합적 증명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그에 의해 범죄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당시 검찰은 피해자의 시신을 찾지 못했고, 살해 시기와 장소도 특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제시된 증거들만으로는 "합리적 의심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사실의 증명이 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간접증거로 추론된 사실 간에 모순이 있는 만큼 파기환송을 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풀리지 않은 의혹들
무죄가 선고됐지만 김씨를 둘러싼 의혹은 말끔히 해소되지 않았다. 1심의 유죄 판단 근거가 됐던 정황들이 대표적 예다. 검찰에 따르면 김씨는 2008년 강도예비죄 등으로 징역 6월을 복역하고 출소한 뒤, 일정한 직업과 소득이 없는 상태에서 빚 독촉을 받으면서도 고급 외제차를 구입하는 등 과한 소비를 했다. 사귀고 있던 다른 여성들에게 "돈이 나올 곳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병력이 없는 윤씨가 고액 보험을 든 점 ▦김씨가 보험설계사에게 '사망보장이 큰 보험'을 요구한 것 ▦피해자 사망 이틀 뒤 바로 계좌를 개설해 보험금을 청구한 점 ▦돈을 받아 다른 여성에게 승용차를 사주는 등 급히 써버린 점 ▦유족에게 보험이 실효됐다고 거짓말을 한 점 등도 풀리지 않은 의혹으로 남게 됐다.
피해자의 아버지 윤모(50)씨는 "의심스러운 정황이 그렇게 많은데 법원이 덮어주고 정당화시켜준 것 아니냐"며 "앞으로 보험을 노린 살인 사건이 다 이렇게 우습게 될까 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김혜영기자 shine@hk.co.kr
이성택기자 highn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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