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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9월 13일] 공공미술작품과 공공미술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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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9월 13일] 공공미술작품과 공공미술상품

입력
2013.09.1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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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백화점 쇼윈도의 소위 '명품'을 높게 치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아주 비싸기 때문이다. 아주 비싸서 그 물건 자체가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밖으로 명시하고,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를 구별 짓기 때문이다. 이때 명품의 경제학적 기초 조건은 한정 수량 생산과 소수가 독점하는 소비에 있다. 사람들은 그 생산과 소비의 단순한 조건에 평범함을 넘어선 가치, 일상적 소비로는 헤아릴 수 없는 내력, 범접하기 힘든 존재감, 실용성을 무화시키는 독특함 등 복합적 의미를 주입한다. 애초 비싼 물건일 뿐이었던 것은 그렇게 해서 구렁이 담 넘듯 '명품(名品)'의 지위에 오르고, 업자들은 더 비싼 값과 더 휘황한 의미를 붙여 가며 판매고를 올린다.

따지자면 미술작품이 명품가게 물건보다 훨씬 소수고 귀하다. 그리고 통상 여하한 고가 상품보다 매우 가격이 높고, 제도를 통해서든 사람들 고정관념에서든 특별한 존재로 취급된다. 그럴 수 있는 배경은 예술의 독창성과 유일무이함을 긍정하는 공동체의 정신, 예술가의 미적 상상력과 창조 활동을 상품 생산 및 소비와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평가하는 사회체제 및 의례다. 분명 미술작품은 그런 사회적 배경에 힘입어 일상용품은 물론 초고가 상품을 초과하고 압도하는 독점적, 우월적 지위를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가령 그런 미술작품이 독창성 대신 공장에서 찍어 나온 듯 획일적일 때, 유일무이한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난무하며 지겨움까지 유발할 때 우리는 그것을 여전히 귀하고 특별한 존재로 존중할 수 있을까? 그런 것이 '작품'이라는 미명 아래 사람들에게 감상을 강요하고, 작품으로서 지위를 내세워 어떤 대단한 의미 부여와 처우를 요구할 때 우리는 무조건 그에 동의해야만 할까?

얼마 전 세종시를 다녀왔다. 공공미술작품 심사를 위해서였다. 1만㎡ 이상 건축물에 미술작품을 의무 설치해야 하는 문화예술진흥법에 따라, 세종시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이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3단계에 걸쳐 약 72억원의 예산으로 정부세종청사 실내외 및 옥상에 설치할 공공미술품의 2단계 사업 심사였다. 이미 최종심사가 끝나 13구역의 17점 선정후보작과 심사위원이 공식 발표됐기 때문에 내용을 다시 소개할 필요는 없으며, 나의 심사 사실을 밝혀서 문제가 될 소지 또한 없다. 그럼 이 얘기를 꺼내든 이유는? 미술작품, 그것도 공공의 삶과 직결되는 정부청사에 국가예산으로 조성하는 공공미술작품의 작가가 어떤 사회적 가치와 기능, 어떤 공동체적 관심과 윤리를 기본적으로 고려해야 하는지 말하기 위해서이다.

공공미술에 대한 정의가 각 시대와 사회 환경에 따라서, 또한 미술의 조류에 따라서 변해왔다 하더라도 결코 변할 수 없는 근본조건은 그 미술이 공공에 의한, 공공을 위한, 공공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동시에 공공재로서 그러한 미술의 창작과 향유를 법으로 보장하는 데는 미술작품을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 예컨대 창조성, 독창성, 아름다움 등 미학적 가치의 대상으로 보는 사회적 합의가 깔려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실제 이번 정부세종청사 미술작품 공모작들 다수는 조형물업자들의 유통 상품, 상투적 양식들의 짜깁기, 공모 맞춤형 복제품에 가까웠다. 예술을 존중하는 사회적 의식을 작가들이 나서서 배신한 꼴이며, 공공미술을 한다면서 공동체에게 귀하고 값진 예술성대신 초고가 물품 목록을 들이민 꼴이다.

국민 대다수가 알다시피 세종시는 참여정부 때 행정수도로 처음 입안돼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국가균형발전'과 '지속가능한 모범도시'를 지향하며 완전히 새롭게 조성중인 '특별자치시'다. '행복도시'라는 별칭은 그래서 단지 '행정중심복합도시'의 줄임말이 아니라 뭔가 미래를 꿈꾸고 평화로운 현재를 기대할만한 곳의 이름으로 느껴진다. 그런 도시의 공공장소를, 그 공공적 이상과 실제 삶의 현장을 컴퓨터로 조작한 유사 공공미술 제안서들이 넘보고 있다. 그럼 당장의 우리 일은 그런 가짜 미술을 길거리 상품과 차별 없이 대하는 것이다.

강수미 미술평론가ㆍ 동덕여대 회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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