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국민학교였다. 나는 서울의 모 국민학교 1학년 24반 54번이었다. 한 반에 100명 가까운 아이들이 있었고, 복도에는 24반 외에 두 개의 학급명패가 더 있었다. 우리 반은 아침 반으로 오전 3교시 수업을 했고, 점심 반은 중간에 3교시, 저녁 반은 오후에 3교시를 했다. 콩나물 교실에서 복작거리며 몇 년을 다녔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학교 운동장을 반으로 나누는 블록 담 공사가 시작되었다. 우리 학교가 2만 명이 넘는 세계 최대의 국민학교라 국제적 망신거리가 되기 때문에 학교를 2개로 나누고 일부는 아예 학교를 새로 지어 전학시킨다는 소문을 나중에 들었다. 얼마 뒤 담임선생님은 전학 갈 학생 명단을 호명하였다. 학생들을 셋으로 나누어 한 덩어리는 학교에 남고, 한 덩어리는 블록 담 저편의 학교로 옮기고 한 덩어리는 새로 지은 학교로 전학가게 된 것인데, 나는 새로 지은 학교에 배정되었다. 전학 가던 날 선생님들이 운동장 빽빽이 서 있던 아이들을 한 반씩 죽 인솔하여 새로 지은 학교로 출발하였다. 어미 닭이 병아리 들을 이끌고 가는 모습과도 같았는데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돌산 꼭대기에 지어진 새 학교로 전학한 후 몇 달 동안은 매일 운동장 돌 줍기와 흙 나르기, 풀 뽑기를 거른 적이 없다. 학교가 산꼭대기에 있으니 전망은 좋았다. 어느 날 수업 중 "우리 집에 불났다!"고 소리치며 한 녀석이 뛰쳐나갔다. 무허가 집들은 종이 박스와 비닐로 지었기에 부셔도 금방 복구가 되자 철거반이 아예 불을 놓아 버린 것이다. 달려가는 녀석의 뒷모습이 애잔했는데 그 녀석을 다시 보지 못했다. 친구들은 여러 계기로 사라졌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귀향하는 상만이네를 배웅하기 위해 버스 종점에서 어머니들은 손을 맞잡고 눈시울을 적셨고, 상만이와 나는 골목 어귀에서 '서로 편지 자주하자'는 기약 없는 약속을 했다. 우리 집 대문 앞 쪽에는 반은 개천 둑에 걸쳐 지은 말뚝 위의 집들이 있었다. 청계천 지류의 둑 옆에 걸쳐 지은 판자 집이었는데, 위쪽부터 차츰차츰 뚝방 집들이 없어지더니 우리 집 앞도 훤해 졌다. 앞 집 살던 친구들도 이후 본 적이 없다.
중학교에 가니 월요일 아침이면 애국조회라는 이름으로 꼬박 1시간을 부동자세로 서서 왱왱거리는 마이크 소리를 들어야 했는데,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체육선생의 몽둥이와 이단옆차기가 날아왔다. 추우나 더우나 교장선생님의 훈화는 길었고 빈혈로 쓰러지는 학생이 있으면 요즘 애들은 정신력이 부족하다고 핀잔하느라 더 길어졌다. 기술 선생은 입안에 가득 모은 침을 맘에 안드는 학생의 입에 쏟아 부었고 흘리거나 몽땅 삼키지 않으면 혼쭐을 냈다. 기율부라는 것이 있어 학생들 간의 구타와 체벌을 방조하였고 체육시간에는 수류탄을 던졌다. 고등학교는 격한 미션스쿨이라 성령의 역사하심의 열기를 시도 때도 없이 느꼈지만 교련시간에는 총검술과 제식훈련을 반복했다. 대학에 가니 교정에는 경찰이 가득했고 최루탄이 난무했다.
내 또래라면 이 정도는 애교로 넘어갈 만큼의 에피소드를 다들 갖고 있고 내 위 세대는 더한 기억을, 아래 세대 역시 무궁무진한 '꺼리'를 갖고 있음도 안다. 어쩌면 요즘이 더할 지도 모르겠다. 사회의 변화 속도, 개성화 등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데 구태의연한 관습은 여전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시답지 않은 얘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우리는 왜 지난 시절의 기억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존중하며 회고하고 있는가를 묻고 싶기 때문이다. 행복한 시절을 누려보지 못한 사람들은 최악을 면하게 해준 차악의 체제를 고마워하고 추억한다는 사회학자들의 지적에 나는 동의한다. 정신이 황폐해지고 분배가 불공평하더라도 배고픔 등 일차원적 욕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 이른바 경제개발시기를 고맙게 여기게 되었다는 말로 들린다. 그 시절 배태된 현재의 불합리를 용인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이론이다. 그러나 나는 음울한 색감으로 기억되는 그 시절이 싫다. 그땐 젊었다는 이유로 그 시절을 좋게만 회고하고 싶지 않다. 나는 나이를 더 먹어야 되나 보다.
김상엽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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