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기 녹취록' 이후 이어진 온갖 말의 성찬과 보수·진보 양 진영의 관성적인 대응에 지쳤다. 뭔가 정교한 말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간 한국일보의 해당 지면에 쓴 칼럼들을 일별해 보았는데, 이 지면이 생긴 1년 반 가량의 시간 동안 굵직굵직한 일이 많았기 때문인지 사건에 따라 이미 지적한 것들이 많았다.
작년 2월에 이 지면에 쓴 '국가보안법, 이름이 아니라 실질을 봐야'는 북한 트위터 계정을 리트윗한 혐의로 박정근씨가 구속기소된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나는 '사상'은 자유로워야 하며 '행위'엔 책임이 필요하고 그 중간의 '표현'엔 한계점의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 기준은 이제부터는 시민사회가 만들어가야 한다고 썼다. 국보법에 대해 관성적으로 폐지만 말하는 진보진영에 대해 보수가 결코 그 명칭을 포기할 수 없다면 반인권적 독소조항은 없애되 변화된 국제정세를 반영하는 다른 안보특별법을 채워 넣어 이름은 유지하는 식의 '기술적 접근'이 필요하다 제언했다.
작년 4월에 쓴 '누가 종북을 키웠는가'는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사태를 계기로 이석기의 '경기동부연합'이 이슈가 될 때 쓰여졌다. 그때 나는 수십 년간 '종북 늑대'를 외치던 양치기 목동들이 실제로 '종북'이 뭔지는 잘 몰랐단 것이 사태의 본질이라 썼다. "이는 역설적으로 종북에 대해 보수가 별로 위기의식이 없다는 진실"을 보여준다 썼다. 좌파진영 내에서 (경기동부연합을 포함한) NL과 대립한 PD들이 사상투쟁을 제의할 때마다 국보법을 핑계로 거절당한 상황을 기술하면서 보수주의자들이 햇볕정책이나 복지제도 정도도 종북으로 매도하는 타성을 벗어 던지지 않으면 진보담론 내부의 혁신 논쟁 역시 마녀사냥으로 매도당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대선 직전 쓰여진 '친일과 친북이 만들어 낸 민주주의?'에서 나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 진영에 일부 친북세력이 있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정부 비판하는 이들은 모두 친북이란 극우의 편견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썼다. 역설적으로 북한의 '바람'대로 한국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이 나라는 북한이 절대 통치할 수 없는 곳으로 변했다고 주장했다. 비록 어떤 젊은이들이 '민주화'를 조롱의 의미로 사용하더라도, 이 문화에서 자라난 그들은 군부독재도 공산왕조도 견뎌낼 수 없을 것이며 그것이 우리 사회의 민주화의 자산이라고 주장했다.
덧붙여 '이석기 일당'에 대처하는 자세에 대해서도 몇 마디 하겠다. 나는 그들이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는 상황을 진지하게 상정하고 모의를 했기 때문에 '사상의 자유'로 그들을 옹호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표현의 자유의 한계선'의 문제에 들어섰고, 법리적 처벌이 필요한지 아닌지를 따져봐야 할 문제다. 두 논점에 대한 토론은 가능하지만 '사상의 자유'를 이유로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용인해 달라 할 수는 없다.
그래도 나는 녹취록 시점 이후 전쟁의 위기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그들이 추가적 모의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논의를 하지 못한 그들을 법리적으로까지 처벌하지는 않는 세상을 희망한다. 'RO' 구성원의 내란음모죄 처벌을 바람직하지 않게 본단 것이다. 그럼에도 제 이념을 들킨 정치세력의 유권자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한다고 본다. 녹취록 내용과 맥락을 볼 때 그걸 농담이라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석기 의원의 문제는 그와 별개로 봐야 한다. 국가기밀에 접근할 수 있는 의원의 위치를 생각해 봤을 때, 그가 이를 북한에 넘길 수도 있음을 생각할 때 그렇다. 체포동의안은 구속수사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있다면 동의할 수도 있는 사안이다. 녹취록이 사실이라면 입법부에서 추방되는 건 감수해야 할 것이다. 단, 그 제명은 그가 법리적 유죄는 아니더라도 그런 발언을 했음이 매우 명백해진 순간에 이루어짐이 타당하다고 본다.
나는 '종북세력 척결'과 '사상의 자유에 대한 공안탄압'이란 극단적 논의 사이의 이러한 논의가 우리 민주주의에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윤형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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