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부터 차일피일 미루던 일을 끝냈다. 별것도 아닌데 계속 미루다보니 가을이 깊어서야 짐을 덜었다. 아침 일찍 눈이 뜨여 커튼을 걷고 전축을 틀었다. 잠이 덜 깬 상태로 밖에 나가 코스모스를 바라보았다. 인디언 음악에 맞춰 이슬을 머금은 코스모스들이 춤을 추었다. 마당을 서성거리다 마루 밑에 껴있는 방부목 널빤지를 발견했다.
마당 귀퉁이에는 잎이 무성한 산뽕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새로 나온 잎이 연둣빛일 때 사각 탁자를 만들어 그늘에 놓자고 나와 약속했다. 낮은 산이 감싸 안은 이곳의 지형을 감안한 탁자였다. 벤치를 네 개 만들어 사면의 풍경을 감상할 참이었다.
창고로 들어가 줄자와 톱을 찾아들고 승용차 시동을 걸었다. 지난봄에 메모지해둔 탁자와 벤치의 길이와 넓이, 다리의 길이가 적힌 종이는 차안에 있었다. 철물점에 가서 방부목을 절단해 싣고 돌아왔다. 토스트로 간단하게 아침을 때우고 작업을 시작했다. 대단한 목수라도 된 듯 신이 났다. 목에 건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며 해를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날이 밝기 무섭게 밖으로 나가면서 이불을 개 장롱에 넣었다. 바가지에 찬물을 떠와 손에 적셔 얼굴에 뿌리고 그래도 안 일어나면 옷을 걷고 가슴에도 뿌렸다. 날이 새는 시간에 일어나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하루 종일 집에서 노는 날은 시간이 더 더뎠다. 한참을 놀다 올려다봐도 해는 제자리걸음이었다.
뭔가에 홀려 정신없이 살았던 것일까. 그동안 해가 어디서 떠서 어디로 지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탁자와 벤치를 만들면서 오랜만에 얼굴을 찡그리고 해를 보았다. 해는 급한 마음을 따라 빠른 걸음걸이였다. 기껏 탁자를 만들어 다리와 테두리에 연둣빛 페인트칠을 했는데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전동드라이버를 돌려 나사못을 박았다. 곧 해가 지고 컴컴해질 것 같아 조급해졌다.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실수를 연발하게 되었다. 잘못 박은 못을 뺄 때는 마음이 더 급해 허둥거리게 되었다.
탁자 위에는 연둣빛 페인트를, 벤치 위에는 오일스텐을 칠하지 않았다. 오늘 당장 차를 마시고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터를 고르고 탁자와 벤치를 옮겨 자리를 잡았다. 그때서야 매미 울음소리와 농로 건너편에서 알밤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연둣빛인 대추알들이 가을 햇살을 받아 빛났다. 대추나무를 감고 올라간 하눌타리 열매들이 대롱거렸다. 더위가 언제 물러갈까 싶었는데 다음 주면 추석이었다.
몇 해가 지난 추석 저녁이었다. 어머니와 나는 옥상에 나란히 앉았다. 어머니는 아래채 함석지붕 위로 오른 측백나무 벼슬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어머니의 눈시울에는 붉은 페인트칠 달빛이 들어앉아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돌아다니다 보면 아침 먹을 때가 되고, 들일 나갔다 들어와 점심 챙겨 먹고 낮잠 한 숨 자고 담뱃잎 따다 엮어 하우스에 널면 금방 저녁 먹을 때가 되지. 마루에 전깃불 밝히면 언제 들어왔는지 제비 한 쌍이 지들 둥지 똥 바침대 대못에 앉아 저녁 먹는 걸 구경하지 뭐냐. 저 나무들은 다 지켜봤을 겨. 별것 있남. 금방 지나가는 겨. 저녁 먹으면 텔레비 틀어놓고 다리 뻗고 잠들어야 하는 겨. 어제가 모두 전생 같은 겨. 한참을 말을 끊고 숨죽이던 어머니가 내 등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잠깐 지나가는 겨. 싸우지들 말고 살어. 그게 최고여. 어머니는 딴전을 피우는 내 얼굴을 보며 마지막 쐐기를 박듯 말했다. 똥독도 항상 다독거려야 하는 겨. 다독거리지 못하면 휘젓지 말아야 하는 겨. 휘저으면 네게만 냄새 난다는 것만 알고 살어. 그럼 다 된 겨.
툭 툭 밤알이 떨어지고 밤송이가 농로를 굴렀다.'해가 다 갔다.'어머니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붉은 플라스틱바가지에 쌀을 씻으며 하시던 혼잣말이었다. 조금 남은 해가 무심하게 붉었다.
이윤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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