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정보기관 해외주재원이었다. 나는 출장지에서 그를 만났고, 보름 남짓 머무는 동안 그의 도움을 받았다. 도움이라야 자잘한 생활정보 따위를 알려주고 두어 번 자청해서 차를 태워주는 정도였지만, 그 작은 살가움이 고마웠다. 하지만 내가 10년도 더 전에 스쳐 보낸 인연을 지금도 기억하는 까닭은 받은 정이 빚으로 남아서가 아니라 그의 말 한 마디가 못다 푼 수수께끼처럼 께름칙하게 남아서다. 떠나기 전날 인사라도 챙길 참으로 초대한 식당에서 그는 내게 대수롭잖은 어조로 말했다. "선생님이나 저나 애국하는 일인데요 뭘~"
그 뒤로 자리의 기억은 거짓말처럼 텅 비어, 저 말의 앞 뒤에 어떤 말이 오갔는지 모른다. 다만 일순 말문이 막혀버린 느낌, 당혹감으로 달라진 낯빛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먹은 기억만 선연하다. 당시에도 그의 직장은, 박정희 시절에는 못 대겠지만, 국가폭력을 석연찮은 방식으로 기획하고 집행하는 곳이라는 의심을 사고 있었다. 나는 '애국'이라는 단어의 그 일상성이 섬뜩했고, 손수건 한 장 건네는 정도의 사적인 성의나 먹고 사는 일 하나하나가 '국민교육헌장' 수준의 공적 사명으로 가볍게 치환되는 맥락이 어찔했다. 훗날 그 조직에서 일하는 다른 이를 만났을 때 "당신네 회사에선 '애국'이란 말이 일상적인 조직 방언 같은 거냐"고 진지하게 물은 적도 있었다. 지금도 나는 저 단어를 맞닥뜨리면 그 때의 '애국'이 떠올라 속이 메슥거려진다.
'애국'이 유행어처럼 쓰이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80년대 대학시절이 그랬다. 광장에서 거리에서 또 나부끼는 깃발 속에서 질리도록 듣고 보았던 단어가 애국이었다. 때로는 스스로도 자못 비장하게 혀끝에 올렸을지 모른다. 물론 그 애국과 저 애국은 전혀 다른 애국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한글보다 먼저 배운 게 국가(國家)도 국가(國歌)도 아닌 애국가였고, 초ㆍ중등 12년 동안 거의 매주 이열 종대로 줄 서서 받던 게 애국조례였다. 그 애국도 앞서의 것들과는 다른 애국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나의 메슥거림은 그러니까, 상이한 애국의 소명에 떠밀려 이리저리 부대껴야 했던 시대적 멀미, 세대적 멀미 같은 것일까.
그래서 나는 동의되지 않은 각자의 도식 안에서 창도 되고 방패도 되는 '애국'이, 그리고 국가가 보어나 목적어의 자리에 놓인 구국, 국익 같은 모든 낱말이 불편하다. 아니 두렵다. 대개 그 창은 힘센 자와 다수가 타자에게 떠세할 때 휘두르는 무기였고, 자신들의 권력 이익을 감추는 데 동원하는 방패였다. 그들이 창과 방패를 휘두를 때마다 약자는 제 권리와 명예를, 때로는 생떼 같은 목숨까지 저당 잡혀야 했다.
국가정보원 3차장을 지냈다는 한 인사가 최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공판에 나와 국정원의 선거 및 정치 개입을 "젊은 세대의 올바른 국가관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며 감쌌다고 한다. 한 마디로 국가를 위하는 일, 애국하는 일이니 시비 걸 일 아니라는 거였다. 40년 전 오늘 칠레의 전 독재자 피노체트가 선거로 출범한 인민연합의 대통령궁을 폭격하고 시민들을 학살하면서 내세운 명분도 '구국의 결단'이었다.
내게 저 난폭한 국가관은, 남의 신성한 결혼식장에 오물을 끼얹고도 진리라는 신의 말씀을 좇았다며 당당했던 광신도의 종교관과 다르지 않다. 십자군의 열정으로 인간을 모욕하는 이에게는 그 자신에 대한 시민사회의 정당한 모욕조차 순교적 승화(?)의 땔감이 된다. 누구도 모욕할 수 없고 무엇으로도 모욕되지 않는 영혼이 있다면, 그 영혼은 천사의 영혼이거나 악마의 영혼일 것이다.
나도 내가 나고 자란 이 나라가 소중하다. 이 나라의 체제와 법과 제도를 존중하고, 세금 내며 더불어 살고 있는 시민들의 권리를 나의 권리만큼 귀하게 여기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지금처럼 푸른 하늘과 청량한 바람을 사랑하고, 내내 지금 같기를 소망한다. 딱 그 만큼이 내가 생각하는 애국이라면 애국이다. 거기에 더 얹어 뭔가를 강요하고 훈계하는 애국이 나는 싫다. 아니 두렵다.
최윤필 기획취재부장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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