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습니다. 릴케의 '가을날'이란 시가 저절로 입 안을 맴도는군요. 한때는 독서가 가을의 주인공이었는데, 그 자리를 이제는 걷기가 꿰찬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실로 요즘 걷기 열풍이 대단합니다. 제주 올레길의 성공으로 촉발된 이 열풍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지리산 둘레길과 강릉 바우길 등 새로운 길이 수없이 생겨나고 있고, 지자체마다 경쟁적으로 길을 만들어 선전해대고 있으니, 몰려다니기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들이 가는 곳이니 나도 꼭 가봐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형편입니다.
우리나라가 가난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고 건강에 관심이 쏠리면서 자연스럽게 등장한 것이 웰빙 문화입니다. 여기에 맞춰, 몇 년 전만 해도 등산이나 마라톤이 인기있는 운동으로 각광을 받았지요. 거기에 우리 사회의 평균 기대수명이 늘어나면서 위험하고 격한 운동보다는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쉽고 간편한 운동을 선호하는 쪽으로 추세가 바뀐 것도 걷기 열풍과 맞아떨어졌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자동차에 길들여져 집 근처 시장도 차를 타고 다니던 '아줌마'들이 걷기 열풍을 선도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합니다.
이런 걷기 열풍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점도 물론 적지 않습니다. 일부 몰지각한 '걷기꾼'들이 아무렇게나 버리는 쓰레기들로 길들이 몸살을 앓게 되고, 조용했던 산골마을이 떼로 몰려다니는 꾼들의 왁자지껄한 소음으로 이만저만 시끄러운 게 아니라고 합니다. 걷는 길 대부분이 붕어빵 일색이라는 점도 문제지요. 지자체들이 내세우는 거창한 홍보문구만 믿고 현장에 갔다가 '짝퉁에 속은 느낌'이라며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또는 걷는 것 자체가 좋아서 걷는 걸 누가 말리겠습니까. 그러나 꼭 그렇게 인공적으로 만들어 선전해대는 곳에 몰려갈 필요가 있을까요. 길을 걷는다는 것은 번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 좀더 호젓하게 그리고 한가로이, 발길 닿는 대로 걸어야 제맛이지요. 이 땅에는 이름 없는, 그러나 아기자기한 속살을 간직한 길들이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들이 굽이굽이 이어진 이 땅에는 걸어볼 만한 산길이며 숲길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런 길을 찾아가 헤매는 것도 묘미가 아닐까 싶군요.
굳이 올레길이나 둘레길까지 찾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길은 그렇게 멀리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과 주변, 도처에 길이 있습니다. 당장 가벼운 차림으로 우리 동네의 길을 찾아나서 보면 어떨까요. 매우 낯익은 그 길을. 그러나 막상 걷기 시작하면 그 길은 낯선 길로 바뀝니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지금까지 잘 보이지 않던, 아니 평소엔 무심코 지나쳤기 때문에 있는 줄도 몰랐던 풍경들이 새로운 얼굴로 우리를 맞아줄 것입니다.
베르나르 올리비에라는 프랑스 사람이 있습니다. 환갑이 지난 나이에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까지 1만2,000km에 이르는 실크로드를 오직 걸어서(그것도 혼자서) 여행하기로 작정하고, 4년에 걸쳐 그 꿈을 실현함으로써 도보여행의 귀감이 된 분이지요. 그가 작년 가을에 한국에 와서 '걷기 열풍'을 보고 놀란 게 있는데, 하나는 걷기에 좋은 길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혼자 걷는 사람이 너무나 없다는 것이었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혼자 걸어야 한다. 혼자 걸어야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다. 그래야 생각도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걷기를 무슨 운동처럼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걷기를 통해 운동(특히 다이어트) 효과까지 보겠다는 조바심은 오히려 걷기의 의미를 훼손시킵니다. 그래서 나는 제주 올레의 표어를 참 좋아합니다. '놀멍 쉬멍 걸으멍!' 그렇게 산책하듯, 몸과 마음을 다잡는 게 아니라 오히려 놓아버리듯 천천히 걷다 보면, 때로는 머릿속이 하얗게 표백되거나 텅 비어버린 듯한 무념무상의 느낌을 경험할 수도 있는데, 여기에 걷기의 참맛이 있는 게 아닐까요.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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