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고통을 소화하는 힘… 유머가 우릴 구원하리라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고통을 소화하는 힘… 유머가 우릴 구원하리라

입력
2013.09.09 12:55
0 0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국내 출간유대의 우화적 전통 재현한 짧은 극단편능청스러운 상상력으로 실존적 혼란 통찰"카프카 통해 독자와 불안 나누는 법 배워""이-팔 '희생자의식 챔피언십' 치르는 듯 고통에 익숙해져 미래 받아들이기 힘들어유머란 약자가 존엄성을 보존하는 무기"

#키스 중 혀를 다친 여자는 연인의 입 안을 의심한다. 연인이 잠든 사이 입을 벌려보니 그의 혀 밑에는 아니나 다를까 지퍼가 달려있다. 지퍼를 열자 튀어나오는 것은 여자의 옛 연인. 여자는 잠든 현재의 연인을 구겨 쓰레기통에 넣고, 옛 연인과 함께한다. 그러다 불현듯 자신의 혀 밑을 살펴보니, 지퍼는 거기에도 있다. 나는 누구지?('지퍼 열기')

#거짓말의 효용을 너무 일찍 깨달아버린 소년은 거짓말 하나로 어떤 난처한 상황도 날렵하게 모면할 수 있는 능란한 남자로 성장한다. 그의 창작서사 속에서 있지도 않은 고모는 갑자기 시력을 잃었고, 독일셰퍼드는 차에 치어 두 다리가 마비됐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거짓말로 시력을 잃고 다리를 잃고 암에 걸리고 곧 죽게 된 인물들이 실제로 살고 있는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거짓말 나라')

독창성이야말로 모든 소설가의 당연한 직분이지만, 이 작가는 거의 이 분야를 '전공'으로 삼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작품마다에 새겨진 작가의 지문이 너무 또렷해, 영국 가디언지의 표현을 빌자면 "다른 누군가의 작품으로 착각하는 일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작가"다. 단편소설이라는 용어조차 무색하게 서너 페이지로 끝나버리는 극단적으로 짧은 길이, 지루한 하루하루의 일상을 기묘한 초현실적 사건들과 나란히 놓고 버무리는 능청스럽고도 자유분방한 상상력, 무엇보다도 일상의 구어체로 작품 곳곳에 부려놓는 어마어마한 유머. 이스라엘 문학의 젊은 기수에서 전 세계가 주목하는 작가로 부상한 에트가르 케레트(Etgar Keretㆍ46)를 9일 만났다.

소설 영화 동화 만화 TV 등 전방위에서 작가로 활약하고 있는 케레트가 그의 소설집 (문학동네 발행)의 국내 출간을 맞아 한국에 왔다. 그의 여덟 번째 소설집이고, 국내에 소개되기로는 두 번째 책이다. 250쪽 남짓한 책이라 계산대로라면 몇 시간 만에 독서가 끝나야 하건만, 36편의 '극단편'이 묶인 이 책은 각 단편 사이, 독서의 여백이 길다.

"항상 장편소설을 쓰려고 책상에 앉는데 소설이 3,4 페이지에서 끝나버린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내 성격의 문제다. 글쓰기란 나에게 폭발과 같다. 느리게 폭발하는 법을 모르겠다."

그 폭발의 잔해로 남는 것은 통찰이다. 탈무드로 대표되는 유대 서사문학의 우화적 전통을 고스란히 체현하고 있는 이 짧은 이야기들은 그의 표현을 빌면 "동화나 꿈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 이스라엘의 문학적 영토를 개척한 아모스 오즈나 데이비드 그로스만 같은 선배 작가들의 유장한 거대서사를 거스르며 그가 탐색하고 있는 주제는 현대인의 실존적 혼란이며, 그가 현실과 초현실을 넘나들며 진솔한 일상의 구어체로 빚어내고자 하는 것은 "실재적 현실이 아니라 감정적 현실"이다. 그가 흔히 카프카에 비견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카프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지. 이스라엘의 문학 전통에서는 현자나 권력자 같은 사람들이 작가를 했다. 지혜를 설파하는 솔로몬 왕처럼. 반면 카프카는 약자도 작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는 "작가라는 사람이 지혜가 아니라 불안이나 두려움 같은 것도 독자와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카프카를 통해 배웠다"고 말했다.

중동의 화약고에서 나고 자란 작가가 이 현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그게 더 경이로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케레트의 작품에는 중동의 현실이 배경으로 삼투되어 있을 뿐, 분명한 메시지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이 모호성은 때때로 어떤 독자들을 화나게 하고, 작가로 하여금 '당신은 어느 편이냐'는 폭력적인 질문에 시달리게 만든다.

"나는 3년간 군 의무 복무를 하던 18세 때, 가장 친한 친구가 눈 앞에서 자살하는 모습을 봤다. 이마를 관통한 총알이 그 친구 뒤편의 나무벽에 박히는 것까지. 그리고 그 12시간 후 교대근무를 나가 48시간 혼자 있었다. 어릴 때는 컴퓨터 천재였던 형을 따라 컴퓨터를 공부하고 싶었는데, 그 사건으로 인해 작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48시간 동안, 무언가를 쓰는 것만이, 나를 다른 세계로 옮겨놓는 것만이 생존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케레트는 "평화에 대해 정치인들처럼 클리셰를 늘어놓는 것은 작가의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제가 작가로서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독자들에게 폭력의 트라우마가 어떤 건지, 외국인혐오증이 어떤 건지, 정치적 슬로건 아닌 소설에 의해 제시하는 것이다. 그 경험을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희생자의식(victimhood)의 챔피언십을 치르고 있다. 박해라는 역사적 고통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양쪽 모두 더 밝은 미래가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것 같다."

그래서 케레트는 더더욱 유머를 사랑한다. "유머는 항상 약자의 무기였다. 약자가 자기의 인간 존엄성을 보존하기 위한 수단. 제가 주로 갖고 있는 감정들은 굉장히 강렬하고 고통스런 감정들이다. 그것들을 소화시킬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유머다."

그가 어릴 적 살았던 텔아비브의 동네는 아주 난폭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수시로 얻어터지며 살았는데,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되 웃기게 했더니 때리지를 않더라는 거다. 이 희대의 스토리텔러에게 유머는 그렇게 "거의 본능"이 되었다. 그의 소설은 정말 웃긴다. 우리 인간의 이 부조리한 실존을 구원하는 것은 유머라고, "유머가 너희를 구원하리라"고 말하는 듯이.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