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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정의 애고에코/9월 9일] 태풍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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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정의 애고에코/9월 9일] 태풍을 넘어서

입력
2013.09.08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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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이서 등산을 해본 사람들은 다들 경험해 보셨을 것이다. 선두에 선 사람을 따라서 산길 오르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다. 앞선 사람이 날쌔게 올라간다 해도 뒤에서는 어느 길로 가야하는지가 잘 보이기 마련이라 금새 따라 잡을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이 맨 앞에 서게 되는 순간, 등산의 어려움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특히 길이 뚜렷하지 않은 곳에서는 한발 한발 내딛는 것이 고민의 연속이다.

현재 우리 과학기술계가 직면한 문제도 이와 유사한 상황이 아닌가 싶다. 일제시대와 해방 직후에는 일본의 고등교육 기관이 유일한 롤 모델이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다수의 학술 용어 뿐 아니라 과학계의 위계질서까지 많은 부분이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미국이 오랜 기간 우리의 강력한 멘토였다. 미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수여받은 과학자들이 속속 귀국하여 우리 과학기술계를 주도하였고, 우리나라 고등교육 기관의 과학기술 연구는 미국 따라하기라고 단언해도 무리가 아니다. 이후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러한 추세에 조금씩 변형을 가하기도 했는데, 영국, 독일, 북유럽 국가들이 우리의 새로운 발전 모델로 칭송받다가, 이번 정권 들어서는 '창조경제'라는 모토아래서 이스라엘이 새로운 멘토로 각광 받고 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보면서 다양한 종류의 다이어트 열풍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살코기만 먹어야 한다, 과일만 먹어야 한다, 하루 한 끼만 먹어야 한다는 둥 뭔가 비법이 있는 듯이 말하지만 사실 핵심은 다른 곳에 있다. 과체중인 사람이 건강한 몸을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전체적인 섭취량을 줄이고 동시에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역량과 연구개발비 규모를 보면 이제는 다른 나라를 따라가며 나의 부족함을 한탄할 시기는 지났다. 남의 뒤를 보고 따라만 갈 것이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는 제일 앞에서 갈 길을 제시해야 할 상황에 다다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우리에게 맞는 과학기술의 모델은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것은 정부의 어떤 정책 결정보다도 중요하다. 그런데 더 큰 걱정은 이 모델이 무엇인지 결정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 과학기술계가 선진국형 피로 현상을 보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다들 먹고 살만해지면 힘든 과학기술 연구는 뒷전으로 밀어 넣기 마련이다. 미국에서도 '폭풍을 넘어'(Rising Above the Gathering Storm)' 라는 거창한 이름의 보고서까지 작성하며 대중들에게 과학기술계의 위기 상황을 알리려 했지만 그리 성공적이진 아닌 것 같다. 현재 필자가 머물고 있는 프린스턴대의 경우에도 학부 졸업생의 40%이상이 부근 뉴욕의 증권사나 컨설팅 회사로 진출하고 있다.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두뇌를 가졌다고 평가된 학생들이 이런 선택을 하다 보니, 국가 차원에서는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자연과학이나 공학 분야의 경우 대학원생 중 아시아 출신 유학생 비율이 반이 넘는 과가 허다하다. 어떤 교수들은 수준 낮은 대학원생 대신, 세계 각처에서 찾아오는 박사후 연구원들을 활용해서 연구실을 꾸려가기도 한다. 불행히도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해결 방법도 불가능하다. 외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의 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배타적인 사회에서 이들이 전문 과학기술 인력으로 우리 사회로 편입되기는 어렵다. 또 우수한 해외 인력을 흡입할 유인책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우리에게는 '폭풍을 넘어서'가 아니라, '태풍을 넘어서'의 상황인 것이다.

다행히 긍정적인 상황들도 상당히 존재한다. 1960년대 이후 각 정권이 정치적 지향점이 상이하기도 했지만, 공통적으로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지원을 계속 확대해 왔다. 그리고 다른 선진국에 비해 아직도 과학기술의 중요성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이 높은 상황이다. 해외의 경우를 금과옥조처럼 되내기 보다는, 우리의 역사적 배경, 사회적 요구와 시스템을 고려한 새로운 과학기술의 발전 모델을 짜내야 할 때이다. 다시 남의 뒤에서 따라가는 상황이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연세대 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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