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믿음과 상식 중에는 한 꺼풀만 벗기면 그 허구성이 금방 탄로나는 것들이 적지 않다. 그런 사례는 특히 먹거리나 환경과 관련된 믿음들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데, 화학농법보다 유기농을 찬양하는 태도라든지, 공장식 축산보다 자연방목으로 생산한 육류를 높게 친다든지, 나아가 전기를 가장 깨끗한 에너지로 보는 생각들이 그러하다. 이런 믿음은 우리의 건강과 직접 결부된 것이기에 더욱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나 자신과 내 가족의 안녕에서만 본다면 이런 믿음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조금만 시야를 넓히면 허점이 금세 드러난다. 가령 유기농은 좋은 것이니 모두가 유기농 농산물만을 찾는다면? 전 국토는 논과 밭으로 초토화될 것이다. 단위수확량이 적고 재배가 느린 유기농의 특성상 경작지를 넓히는 건 어쩔 수 없다. 또 거름으로 쓸 똥들은 다 어디서 구한담? 축산도 마찬가지다. 농약과 호르몬제로 뒤범벅된 옥수수사료 말고 풀만 먹고 자란 한우 고기가 좋다면 횡성과 평창의 숲들을 전부 초지로 갈아엎으면 된다.
그러니 우리가 추구하는 웰빙은 사실상 이 제한된 '웰빙'을 비싸게 구입할 수 있는 사람들의 특권과 능력을 의미한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전기의 문제로 가면 조금 더 복잡해진다. 비싼 전기료를 감당할 능력만 되면 나도 기름보일러를 끄고 방마다 전기히터를 틀어놓고 싶다. 하지만 우리가 깨끗하다고 여기는 전기 대부분이 '이산화가스' 배출의 주범인 화력발전과 대재앙의 화약고인 원자력발전으로 생산되고 있음을 모두가 안다. 전기를 지금처럼 쓰는 한 우리는 비싼 국제유가와 당장의 대기오염을 감수하든지, 미래에 올지 모르는 재앙을 기다리든지 양자택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후쿠시마 원전재해 이후 수산물에서 검출된 10베크렐(통관 기준은 100베크렐) 미만의 방사능만으로도 불안해진 우리 마음은 화력발전으로 돌아갈 수도, 원자력발전을 지지할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요컨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처럼 환경 문제에 잘 들어맞는 말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화학비료로 키운 농산물을 계속 먹든지 전 국토를 개간하든지 선택해야 하고, 대기오염에 시달리든지 방사능 오염을 견디든지 택일해야 한다.
제임스 러브록은 1979년 저서 이후 거의 30년 만에 낸 (2007)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의 허구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한 바 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풍요와 복지의 수준을 유지하면서 환경을 지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대표적인 환경론자임에도 지금 당장은 원자력발전에 더 의존해야 한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방사능 10베크렐쯤은 감수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지속가능한 후퇴'를 채택해야 할 때라고 촉구한다.
화학비료와 유기농 사이에서, 그리고 화력발전과 원자력발전 사이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우리의 신세한탄 속에는 까맣게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성장과 행복에 대한 그릇된 관념이 그것이다. 우리는 경제발전이 시작된 1960년대 이후 언제나 성장해왔고 거기에 맞춰서 행복이 늘어났다는 믿음을 고수하고 있다. 확실히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복지와 행복은 기본적으로 고에너지와 고소비에 기초해 있다. 그리고 경제성장은 이것을 실현해주는 견인차라고 믿는다. 과연 그러한가?
이제 이런 복지와 깨끗한 환경을 동시에 누릴 방법은 없다. 아, 쉬운 방식이 한 가지 있긴 하다. 이미 많은 사람이 주장하듯이 성장을 깨끗이 포기하는 것이다. 불편하지만 이렇게 쉬운 진실도 없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불편했던 예전에도 삶의 만족감과 행복감을 누렸던 기억이 있다. 그때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다. 적당한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행복 양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최적점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경제학자와 과학자와 철학자들은 이 부분을 찾아내야 한다. 글쎄, 너무 이상적인가. 공장식 고기를 안 먹기로 결심한 뒤 탄수화물 과다섭취로 배가 한 뼘은 더 나온 사람의 주장이니 설득력이 없을까 걱정이다.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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