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한 맛집을 비롯 사람이 붐비는 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대기번호표 기계가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90년대 초 국민은행 지점이다. 덕분에 늘 새치기가 끼어들어 울화를 돋우던 줄서기의 스트레스를 크게 덜 수 있었다. 대기번호표 기계가 필요했을 만큼 당시 은행지점에는 입출금과 공과금을 내려는 사람들로 늘 북적거렸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올해. 국민 신한 우리 하나 등 4대 은행은 지점을 포함 점포 68곳을 정리했다(한국일보 6일자 17면 보도). 한편 31곳을 신설을 했으니 줄어든 점포는 37곳이다. 약 7,700개에 달하는 전국 은행 점포 중 10% 이상이 적자상태라고 하니 앞으로 문 닫는 은행점포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이렇게 은행점포가 줄어드는 것은 무엇보다 사람들의 은행 갈 일이 적어졌기 때문이다. 대부분 은행 일을 PC와 스마트폰으로 처리한다. 직원을 만나야만 처리할 수 있는 업무는 전체의 12%에 불과하다.
앞으로 점점 줄어들 은행창구 직원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정보통신(IT)의 발전 때문에 위협받는 직업은 은행원뿐 아니라 우리나라 중산층을 지탱해온 생산직ㆍ사무직 대다수가 해당된다. IT가 이들이 수행해 온 질 좋은 일자리를 빼앗고 있으니, 해결방법은 컴퓨터를 없애고 인터넷을 끊는 것뿐인가.
신기술의 출현이 일자리를 축소시킨다는 주장을 '노동력 총량론'이라 부르는데, 경제학은 이 논리가 오류라 결론 내렸다. 역사적으로 보면 신기술의 출현이 당장은 해당분야 일자리를 없애지만, 신기술 덕분에 생산력이 늘어나면서 신종 직업이 출현해 일자리가 더 많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안심하지 마시라. 늘 그렇듯 경제학의 결론은 옳긴 하지만 별로 쓸모는 없기 때문이다. 언젠간 일자리가 더 늘어날진 몰라도 당장 직장을 위협받는 사람들에겐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연구결과를 보면 IT의 발전은 특히 전통적 중산층 일자리를 집중 공격해 고급 지식과 숙련도를 지닌 소수 전문직을 제외한 대부분의 일자리를 축소시키고 있다. 반면 청소나 식당일 같은 저임 일자리는 컴퓨터의 공격에서 살아남았다. 전문직과 저임 일용직을 제외한 중간 정도의 숙련이 요구된 일자리를 IT기술이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세계적으로 진행되는 중산층 붕괴와 IT혁명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컴퓨터가 발달해도 앞으로 상당기간 채울 수 없는 '중간 기술' 영역이 있다. 이 분야 권위자인 데이비드 H. 오터 미 MIT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고객과 만나거나, 컴퓨터 작업 결과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영역의 중간 기술직들을 '새로운 장인ㆍnew artisans'라고 부르면서 이들이 미래 유망직업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예를 들어 현재 의사의 영역인 질병 진단은 대부분 컴퓨터가 대체하겠지만, 컴퓨터의 진단결과를 해석하고 적절한 처방을 내리는 새로운 장인 간호사는 더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다. 사무직도 회계나 단순 관리 직원은 줄어들겠지만, 컴퓨터가 산출한 각종 경영관련 수치를 시의 적절하게 해석하는 능력을 갖춘 새로운 장인이 된다면 살아남을 수 있다. 은행원 역시 복잡한 펀드나 방카슈랑스 등 금융상품 지식을 갖춰 고객의 궁금증을 해결해줄 수 있다면 안심하고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새로운 장인으로 발돋움하려면, 개개인의 노력만으론 힘에 부치고 정부와 기업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특히 새로 출현할 일자리를 적극 찾아내고, 그에 부응하는 교육의 진화가 필수적이다.
오터 교수는 "앞으로 중간 기술직 취업 기회는 계속 늘어날 것이지만, 전통적 의미의 화이트ㆍ블루 칼라 분야에서는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화이트 칼라도 컴퓨터 언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블루 칼라도 컴퓨터가 산출한 결과물을 고객에게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메시지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육은 여전히 수십 년 간 이어온 문과ㆍ이과 간 장벽조차 허물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정영오 경제부장 직대 young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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