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운드에 선 소래고 선발 김선창(18ㆍ2년) 투수는 공 하나 뿌릴 때마다 송진주머니를 움켜쥐었다. 8회 말 1사, 3 대 2 박빙의 리드 상황. 2루엔 동점주자가 나가있고, 공 하나로 승패가 뒤집힐 수 있다. 등 뒤로 쏠리는 시선을 붙들려는 듯 모자 챙도 연신 만졌다. 그 순간 그는 만년 후보로 뛰고 구르던 긴 시간들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한층 결연해진 눈빛. 그의 공 끝은 9회 말까지 살아있었다.
지난 3일 충북 청주야구장에서 열린 제 41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김군은 팀 창단 첫 승, 자신의 고교대회 첫 승을 올렸다. 투구 수 157개. 그는 완투했다. 초등학교서부터 야구를 했던 그는 야구 명문고에 진학했지만 단 한 번도 시합에 못 나갔다고 했다."출전 기회라도 얻자, 안 되면 관두더라도 일단 해보자, 그런 심정으로 전학을 결심했어요."6회 초 덕아웃에서 그는 "많이 부족하지만 가는 데까지 가보겠습니다"라고 했고, 경기 뒤 소감을 묻자 "제가 끝까지 마운드를 지켰어요"라고만 말했다.
그뿐 아니다. 주장 김기환(18ㆍ2년)도, 1번 타자 정효영(18ㆍ2년)도, 누구도 또 누구도 그런 저런 이유로 전학을 왔고, 재학생들도 나름 '사연'들이 있다고 했다. 그들은 한풀이하듯 경기했다. 공에 머리를 맞아도 달렸고, 못 잡을 게 뻔한 공도 사력을 다해 쫓곤 했다. 휑한 관중석 한 켠에서 아들 기환군을 응원하던 김성길(40)씨는 "얘들은 콜드패 당하는 경기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뻔히 아웃될 상황을 알면서 슬라이딩을 하고, 그물망으로 파울볼이 넘어가는 걸 보면서도 공만 보며 달려요"라며 "프로야구에서는 보기 힘든 열정이 있죠"라고 말했다.
속출하는 이변의 대전답게 우승후보로 손꼽히는 명문팀 선수들도 긴장을 푸는 일이 없었다. 개막일인 지난달 30일 전북 군산명월야구장에서 휘문고를 8회까지 무실점으로 막은 동산고 선발투수 김택형(18ㆍ2년)선수는 팀이 공격할 때도 연습 투구를 반복하거나 파울 지역을 뛰어다녔다. 그는 "이번 봉황대기에서 꼭 우승하고 싶어요. 제게 이 대회가 처음이자 마지막 경험일지도 모르잖아요"라며 땡볕 아래서 씨익 웃었다. 10년째 동산고 경기를 쫓아다니며 응원단을 이끌고 있다는 박윤혁(54)씨는 "아이들이 죽기 살기로 하는 모습에 반해 북과 마이크를 들고 고교야구를 찾는다. 딱 그 때의 젊음에 최선을 다하는 풋풋함이 보이는 고교야구가 좋다"고 말했다. 전주고 신정훈(2년) 선수 아버지 신인균(52)씨는 "봉황대기는 강팀이나 약팀, MVP급 선수나 무명의 선수 모두에게 기량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를 고르게 주는 꿈의 무대"라고 말했다.
또 그래서 주루 플레이나 내야 수비 등 그라운드 곳곳에서 실수가 잦다. 불안한 장면들도 속출한다. 기량이나 경험 면에서 덜 여문 이들이기 때문에 연출되는 그 다이내믹함이 또 고교야구의 맛이다.
개막전 부천고와의 경기에서 13 대 2로 콜드패 당한 전주고의 권성일(18ㆍ2년)선수는 "내년을 준비하는 값진 경험이었다"며 "앞으로 지켜봐 달라"고 주문했다.
야구공처럼 단단한 다짐과는 달리 고교야구의 여건은 아직도 부실하다. 이번 대회도 가족과 극소수 팬들만 관중석을 찾는다. 매미 소리가 관중의 함성보다 더 클 때도 있다. 제 9, 10 프로야구단 창단 조건으로 신생 고교팀들도 생겨났지만 고교야구계는 열악한 현실과 싸운다. 프로야구의 젖줄인 고교 야구부의 수가 턱없이 적고 무엇보다 선수를 못 구해 팀을 못 꾸리는 학교들조차 있다. 전북 지역의 한 고교팀 코치는 "야구는 선수 스카우트가 승패를 좌우하는데 지역 중학교의 우수한 선수들이 다 서울로 가버려 걱정"이라고 털어놨다.
충암고 야구팀 버스를 만 3년 운전해왔다는 우순구(64)씨는 "아이들은 매 순간 한 게임에, 공 하나에 온 생애를 건다.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 자세,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려는 욕심이 보기 좋다"고 말했다. 매미 소리를 함성으로 여기며 그들은 내일도 온 생애를 걸고 경기에 나설 것이다.
군산ㆍ청주=손현성기자 hshs@hk.co.kr
정지용기자 cdragon25@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