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거나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가끔 '민주사회에서 이래도 돼?'라고 말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사는 이곳을 지배하는 원리가 기본적으로는 민주주의라는 믿음을 아직 폐기하지는 않았다.
'관리되는 민주주의와 전도된 전체주의의 유령'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는 이제는 이 믿음을 버려야 할 때라고 도발적으로 주장한다. 미국사회를 향한 진단이지만, 미국의 거의 모든 것이 그렇듯, 한국사회에도 유효하고 적확한 질문이다.
미국의 대표적 진보 정치학자인 셰던 월린은 "우리는 더 이상 민주주의 체제가 아니라 전도된 전체주의 체제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불길해서 더더욱 들어맞을 것 같은 충격적인 진단을 내놓는다. 무엇보다 전체주의를 증오했던 이 냉전의 종주국이, 가장 믿음직스러웠던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어떻게 이런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된 걸까.
작금의 민주주의는 선거자금 브로커, 선거 전략가, 로비스트, 여론조사 전문가들에 의해 관리되고 '사영화'돼 민의를 더 이상 대변하지 못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기업의 인재들이 수시로 국가 경영을 좌지우지하고 경제권력이 손쉽게 국가권력과 결탁하는 현재의 미국은 수많은 주식회사 중의 하나인 '민주주의 주식회사'일 뿐이다. 문화는 어떤가. 동성결혼, 낙태, 종교단체에 대한 정부지원 등의 이슈는 정치투쟁의 대체물일 뿐이다. 반전운동과 민권운동은 간데 없고 전쟁을 도모하는 제왕적 대통령의 순한 백성들만 가득하다.
저자는 물론 현재의 이런 비민주주의 혹은 반민주주의 체제를 곧바로 나치나 스탈린, 무솔리니의 고전적 전체주의와 등치하지는 않는다. 고전적 전체주의는 대중의 정치적 동원화에 열을 올렸던 반면, 전도된 전체주의는 시민을 수동적인 '시청자-소비자'로서의 역할에 매몰되도록 함으로써 탈동원화한다. 전자가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존하고 억압적인 작동양식을 보이는 데 반해, 후자는 CEO로 대변되는 유능한 리더십에 의존한다.
그렇다면 '관리되는 민주주의'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이 '전도된 전체주의'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탈주적(脫走的) 민주주의'를 제안한다. 풀뿌리 민주주의 즉, 진정한 참여의 의미를 복원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는 희망이라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새로운 민주주의는 일시적이고 우발적이며 간헐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탈주적 민주주의의 주권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이 가진 작은 힘을 모으는 것 이외에는 부당한 것을 바로잡을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고, 그들의 입장에서 제기되는 고충에 호응하는 넓은 범위의 가능한 형식과 그 변형이 이 신형 민주주의에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점점 더 입에 담기 부끄러운 어휘가 돼가고 있는 한국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많은 책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