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이 제목을 보고 '거 봐라' 하는 이들 많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그런 이들, 조용히 세상 바라보며 성찰하라고 뽑은 제목이다. 쌍용차 문제로, 국정원 선거부정 사건으로 촛불 들고 사람들이 모였지만 여전히 신문이건 방송이건 그들을 불순한 사람이거나 불만 세력쯤으로 호도한다. 아니 그 정도면 고맙고 황송하다. 걸핏하면, 제 맘에 들지 않으면 무조건 종북세력이란다. 21세기에 이 무슨 해괴한 매카시즘이며 촌스러운 작태인가. 그런데도 그게 통한다. 참 희한한 세상이다. 어쩌다 이리 되었는지 눈앞이 캄캄할 뿐이다.
교사들이, 교수들이 시국선언을 하더니 급기야 성직자들이 나섰다. 천주교 성직자와 수도자 5,038명이 "쌍용차, 약속은 목숨"이라며 선언에 동참했다. 촛불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대략 4분의 1쯤으로 후려칠 수 있지만, 이들의 머릿수는 깎아내리지 못하는 모양이다. 이 사람들을 도무지 마뜩치 않게 바라보는 이들도 많다. 교육자와 성직자는 제 본분에나 충실하라며 그들이 세상일에 관여하거나 간섭하면 안 된다고 점잖게 타이르거나 댓글 다는 알바들 깔아서 험한 말을 마구 지껄이게 만든다. 그들의 속내로는 그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모두 빨갱이로만 여겨질 뿐이다. 혹은 짐짓 점잔 빼면서 정교분리니 신성한 교육이니 하며 나설 데를 가려야 한다고 훈계하거나 경고하고 싶을 것이다.
맞다. 그들의 말이 맞다. 교육자들과 성직자들은 나오면 안 된다. 그들은 학교와 교회 혹은 수도회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의 말은 하나만 맞고 나머지는 전부 틀렸다. 우리가 교육자와 성직자에게 유독 높은 도덕을 요구하는 것은 그들의 직업이 신성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을 존경하거나 대우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그들에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면서 정치나 사회적 문제에 '먼저' 나서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까닭을 먼저 제대로 짚어야 한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마지막 도덕적 보루이다. 결코 가볍게 처신해서는 안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무리 분하고 억울하고 한심해도 그들은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나서는 건 바로 임계점을 코앞에 두고 있을 때만 허용된다. 그들마저 침묵하면 세상은 완전히 암흑이 된다.
그러니 먼저 그들이 나서게 된 상황을 뼈아프게 반성해야 한다. 누가 그들을 거리로 나서게 했는가? 어떤 불의가 그들로 하여금 비장한 선언을 선택하도록 만들었는가? 그들이 무슨 권력과 이익을 탐해서 그럴 것인가. 그들이 나서는 시간은 바로 마지막 순간이라는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다짜고짜 제 입맛에 맞지 않으면 빨갱이니 종북이니 몰아세우기 전에 자신이 저지른 불의와 거짓을 돌아봐야 한다. 그런 고백과 성찰이 진정한 보수의 힘이다. 참된 보수는 없고 사이비 수구와 이익집단들만 설치며 모든 권력이 마치 자신들의 것인 양 안하무인이고 모든 이익이 자신들 자자손손 이어져야 하는 권리인 양 착각하며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거짓과 불의를 일삼고 있는 모습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나의 학창시절은 내내 유신과 독재의 시대였다. 늘 두렵고 분했다. 그래도 당시의 권력자들 상당수는 최소한 부끄러움은 알았다. 유신과 시국선언, 정의구현사제단의 성명 등이 어쩌면 이렇게 40년의 시간을 가로지르며 데자뷰를 일으키는가. 도대체 우리의 역량과 양심은 고작 이 정도에 불과하더란 말인가? 그래서 나는 여전히 두렵고 분하고 부끄럽다. 내 새끼들이 바로 그런 세상에 살면서도 이제는 분노할 힘조차 스스로 아끼고 있으니 이게 제대로 된 세상이고 바른 역사인가?
거리와 광장은 교육자나 성직자가 나설 곳이 아니다. 그들을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그들이 나설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해법은 간단하다. 정의와 진리가,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가 옹골차게 설 수 있게 하면 된다. 최소한 인간에 대한 예의는 서로 지키며 나와 다르다고 틀렸다고 윽박지르거나 입을 틀어막지는 말아야 한다. 그게 세금을 내는 나의 최소한의 요구사항이다. 고작 그것뿐이다. 어쩌다 이리 되고 말았다.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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