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텍쥐페리가 조종했던 초기 남방 우편기들은 유럽에서 아프리카를 경유하여 남미까지 오갔다. 이 비행기들은 기체 결함이나 조종 실수로 낯선 땅에 종종 불시착했는데 사하라 사막도 그 중 하나다.
조종사는 부서진 비행기와 우편물을 남겨두고 지도와 나침반을 챙겨 떠났다. 처음에는 모래 언덕만 넘어도 불안하여 고개를 돌렸다. 조금 더 가면 오아시스에 닿을 것 같기에 점점 멀리 오래 갈증을 참으며 나아갔다. 운 좋게 마을에 닿는 이도 있지만 열에 아홉은 작열하는 모래에 쓰러지곤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비행기 그늘에 숨어 기다렸어야 한다거나 사막의 열기를 충분히 감안하여 탈진하기 전에 되돌아왔어야 한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사라진 동료의 비행기에서 우편물을 챙겨 비행에 나선 조종사의 의견은 달랐다. 언제 올지 모르는 구원의 손길을 기대하며 서서히 죽어 가느니 한 걸음이라도 살 궁리를 하는 편이 낫다. 불시착을 각오하고 남방 우편기를 조종한 의지로 사막을 헤맬 용기를 낸 것이다. 충동이나 조급증이 아니라 준비된 모험이라는 주장이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는 에서 "수영하는 사람에서 파도로 이행하는 순간들"이라고 적었다. 처음부터 모험가를 자처하는 이는 드물다. 생계를 위해서든 삶의 화두를 풀기 위해서든, 각자의 직업에 충실하다가 모험에 가 닿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나 지금이나 지인들은 안전하고 편한 길을 권한다. 그러나 생텍쥐페리는 남방 우편기를 몰았고 혜초는 천축국으로 떠났다. 그들의 목적은 명확했다. 우편기 조종사는 우편물을 무사히 전달해야 했고 학승은 석가모니의 일생이 고스란히 담긴 성지를 빠짐없이 순례해야 했다.
목적이 분명하더라도 길 위의 우연들을 예측하긴 어렵다. 작은 비행기 안에서 생텍쥐페리는 한낮의 평원을 굽어보고 어둠 속 별빛에 젖어들었다. 발바닥을 대지에 딱 붙이고 사는 이들은 결코 알 수 없는 풍광이 한 순간에 압도해왔다. 그날부터 이 예민한 조종사는 돈벌이가 아니라 천지의 변화무쌍함을 만끽하고 또 문장으로 옮기기 위해 조종간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혜초의 발길은 성지인 인도에 그치지 않고 계속 서진하여 지금의 이란 지역 파사국(波斯國)에 이르렀다. 그는 이교도의 풍속과 그들의 마을을 편견 없이 건조하게 적었다. 불교 사찰들만을 옮겨 다닌 당나라 승려 현장의 천축국 기행과는 아주 다른 행보였다. 혜초는 왜 거기까지 갔을까.
미리 품은 목적은 완수했지만 모험은 끝나지 않았다. 그날그날 만나는 세계가 새로운 모험의 대상이자 목적이 된 것이다. 아름답고 밝은 날보다 추하고 어두운 날이 많았다. 벗으로 다가온 이가 강도로 돌변했고 값을 내고 얻은 물엔 독이 가득했다. 이 어둠의 참담하고 갑작스런 최후를 전하는 이야기를 만나기는 어렵지 않았다.
두려운 상상을 누르고 모험을 이어간 이들에게만 소멸의 의미가 차츰 달라졌다. 최악의 결과가 아니라 늘 따라다니는 그림자. 많은 사람들이 벌써 이곳에서 사라졌다. 아니 이 하늘의 해와 달과 별 저 대지의 풀과 꽃과 나무도 사라지고 또 사라졌다. 작아진다는 것 잊힌다는 것이 나란 인간을 감쌌다. 불멸을 향한 안간힘이 무너졌다. 비유가 사실이 되었다. 너는 이 늪으로 빠져들면 안 되겠는가. 너는 저 폭풍으로 휘돌면 안 되겠는가. 삶과 죽음, 생물과 무생물, 단절과 지속, 유의미와 무의미의 경계가 흐려졌다. 소설 에서 항공우편국 책임자 리비에르는 강조했다. "법칙을 이끌어내는 건 경험입니다. 법칙을 아는 것이 결코 경험을 능가할 수 없지요."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이들 중 몇몇이 비로소 모험가를 자임했다. 분초를 다퉈 일상의 주기를 정하고 결과를 확인하려 드는 나날이건만, 모험가들은 회귀를 확신하기 어려운 비주기 혜성처럼 표표(飄飄)하다. 그 혜성은 천 년 혹은 만 년 후에 돌아올 수도 있고 어느 항성에 이끌려 궤도를 바꿀 수도 있고 또 어느 행성과 부딪쳐 산산이 흩어질 수도 있다. 과정이 아니고는 의미가 생겨나지 않는다. 일생을 모험하라!
김탁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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