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일식집·종로 국밥집 등 식당지도 일제시대 일본인 국내이주에 영향받아오뎅·김밥·분식·빵이 한 식탁 오르는 숨가쁜 현대사가 낳은 '혼종 음식문화'식민주의·전통주의·국가주의·세계화 등 여러 담론 뒤섞인 우리 문화사의 단면
독자들에게 우선 이 책은 '늦은 밤 독서용'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제목만 봐선 딱딱한 역사서 같지만 설렁탕부터 장국밥, 냉면, 순대, 치맥(치킨과 생맥주), 신선로에 이르기까지 서른 네 가지에 달하는 진수성찬을 매 페이지마다 마주쳐야 해서다. 침을 꿀꺽 삼키며 책장을 넘기다 보면 우리 근대 역사와 함께한 산해진미들이 한 상 가득 차려져 나와 오감을 자극한다. 야밤에 솟구치는 식욕과 싸울 생각이 없다면 동이 트기까지 잠시 책을 덮어 두는 게 좋을 듯 싶다. 야식의 유혹을 견딜 각오를 하고 책장을 열어본다.
저자인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음식을 문화와 인문학, 그리고 역사학의 시선으로 해석해온 학자. 이번 책은 그가 2011년 펴낸 의 연장선에 있다. 당시 책에서 자세히 다루지 못했던 근대화 이후 100년간 전개된 한국 음식의 다양한 민낯을 충실히 실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사람은 잘났건 못났건 먹어야 살고, 먹기 위해 땀을 흘려 경제 활동을 이어간다. 그러니 역사의 어느 한 페이지를 들춰 보더라도 시대를 풍미한 '한 접시'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책은 개항 직후인 19세기 말 인천 제물포항 주변 청국 거류지에서 시작한다. 당시 인천으로 들어온 외국인들은 당일 곧바로 서울로 이동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 제물포 일대에는 숙박업이 성행했다. 청국 거류지인 탓에 이 일대에 형성된 '중화루' 등 중식당가는 이후 호떡과 자장면의 고향이 되기도 했다. 20세기로 접어들며 경인선이 놓여 서울까지 바로 가는 게 가능해지자 자연스럽게 숙박업과 외식업의 중심은 서울 사대문 안으로 옮겨갔다.
근대 우리의 음식문화사는 일본인의 국내 이주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일본의 식민 지배가 본격화한 1910년 이후 일본인의 거주지와 상가가 밀집한 지금의 서울 중구 명동과 충무로 일대엔 주로 일본 음식점이 들어섰다. 이에 비해 조선인 거리인 종로와 청계천 주변엔 국밥집 등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점은 조선과 일본 음식점이 자리하지 않은 틈새 위치인 중구 태평로 일대에 중국 음식점들이 주로 들어섰고, 이 같은 음식점 지도는 지금까지 유효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가장 오래된 외식업인 국밥집을 통해 우리 민족의 쌀밥 사랑과 '밥심'의 문화를 짚어냈다. 빨리 먹고 치울 수 있는 장점을 가진 장국밥은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외식거리로 성장한다. 하지만 경제 성장으로 식생활이 풍성해지기 시작한 1960년대로 들어서며 국에 밥을 만 국밥은 인기를 잃어가고 '따로국밥'이라는 기이한 메뉴가 등장한다.
책은 국밥 못지않게 서민 음식의 대표격인 설렁탕에 얽힌 문화사로 시선을 옮겨간다. 설렁탕은 전통 사회에서 천민 대접을 받던 백정들이 20세기 초 근대 도시에서 고깃간을 열고 거기서 나오는 부산물로 설렁탕을 만들어 팔면서 대중화했다. 그들은 같은 천민이던 옹기장이들이 만든 옹기에 설렁탕을 담아 팔았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자들도 체면 생각 접어두고 몰래 시켜 먹던 설렁탕은 분주한 현대인의 끼니로 자리 잡는다. 일제강점기부터 존재했던 대폿집은 1970년대 급속한 경제 성장기를 거치면서 탁백이국, 갈비구이, 순대 등 안주거리를 다양하게 늘려갔고, 고단한 하루를 한 잔 술로 마감하는 서민의 안식처가 됐다.
드라마 같은 개화기를 겪은 후 일제 강점기, 해방과 전쟁, 경제 성장으로 숨가쁘게 이어진 한국 현대사는 음식 문화에도 독특한 혼종을 일으켰다. 일제 식민 지배가 남긴 흔적인 오뎅과 김밥, 미국의 잉여농산물 유입이 유행시킨 분식과 빵류가 한 식탁에 오르게 된 것이다. 1980년대 프랜차이즈 음식점의 도입은 한국의 음식 문화가 본격적으로 세계 체제에 편입되는 계기가 됐다. 저자는 현재 한식의 정체성을 다양한 혼종이라 진단하면서 이는 식민주의, 전통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세계화 담론이 뒤섞여 만들어낸 우리 문화사의 단면이라 본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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