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량 생산, 대량 판매, 기계, 공장. 이런 단어들이 대한민국에서 갖는 의미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교과서에 나오는 방망이 깎는 노인은 감히 어떤 기계도 따라 할 수 없는 아날로그적'손맛'으로 우리를 감탄시킨다. 기계는 '생활의 편의를 돕는 친구'가 아니라 '인간을 생산 현장의 중심에서 밀어낸 적'이란 개념은 생각보다 일찍 우리 머릿속에에 자리잡은 듯 하다.
이미 100년 전 독일 바우하우스가 산업 현장에서 기계의 혁신적 역할을 인정하고 인간의 자리를 재정립했지만, 기계와 산업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여전히 감정적인 데가 있다. 그리고 이는 산업혁명의 산물인 디자인에 대한 홀대, 디자인 산업의 낙후, 디자인 전문 박물관의 부재와 무관하지 않다.
1989년 영국 최초의 디자인 전용 박물관으로 문을 연 런던디자인박물관은 수공예품이 아닌 공장에서 기계로 찍어낸 제품만 전시한다. 디자인을 '현대 사회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암호'라고 주장하는 이곳은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와 대량 생산으로 인한 환경 오염 걱정을 잠시 접고 오직 디자인의 중요성을 외치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다. 런던디자인박물관 관장이자 영국 왕립미술대학 객원 교수인 데얀 수딕이 4일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참석 차 한국을 찾았다.
런던디자인박물관은 어떤 제품을 어떤 식으로 보여주는가
디자인에는 건축ㆍ패션ㆍ가구ㆍ그래픽ㆍ운송 등 다양한 영역이 있다. 매년 6, 7개의 주제로 전시를 하되 분야가 겹치지 않도록 한다. 지난 번엔 구두 디자이너 크리스찬 루부탱 전시를 했고 지금은 건축 관련 전시 중이다. 일부 계층만 이해하는 전시는 원하지 않는다. 때론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모든 사람이 즐길 수 있는 전시를, 가끔은 전문가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예술영화 같은 전시를 한다. 멀티플렉스 극장에 비유할 수 있겠다.
박물관이 선호하는 디자인이 있나, 기능적이어야 한다든지 디자이너의 철학이 뚜렷해야 한다든지
디자인은 언어다. 한 사회가 그 목적과 가치를 반영하는 물건을 창조할 때 디자인이란 언어를 사용한다. 나는 말이 많은 디자인이 좋다. 예를 들어 19세기 타자기와 80년대에 나온 최초의 노트북, 그리고 아이패드를 한자리에 놓는 것만으로 우리의 의식과 생활 방식의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이런 물건들은 박물관이 구입해 영구 소장한다.
영구 소장품은 현재 몇 점이고 어떤 기준으로 소장을 결정하나
3,000여개의 제품을 소장 중이다. 일부는 박물관 한 쪽을 할애해 전시하고 있으며 5년마다 바꾼다. 우리의 '소장 정책'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지향한다. 중세 장신구처럼 물건의 역사를 보여주는 제품이 아니라, 20년 후에 "그때 이런 상품이 있었다"면서 사회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물건을 산다. 디자인은 시대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앞을 내다보는 것이다. 2015년에 지금보다 3배 더 큰 건물로 이전할 예정인데 그때는 영구 전시를 고려하고 있다.
공장에서 만든 제품만 전시하고 수공예품은 취급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공장 제품 취급이 원칙이지만 가끔 예외도 있다. 지난 번엔 보석을 전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디자인은 대량 생산 체제를 위해 필요하다. 기계가 등장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연결 고리가 끊어졌다. 내가 만든 물건을 누가 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되자 디자인이 끼어들 틈이 생겼다. 디자인은 공예와 달리 만드는 기술과는 무관하다. 대량 생산 체제는 장인으로부터 생산자와 디자이너를 각각 독립시켰다.
한국에는 아직 디자인박물관이 없다. 디자인 전문 박물관이 갖는 사회적 역할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예를 들어 대중의 안목이 개선된다든지
내가 강조하고 싶은 건 좋은 디자인과 나쁜 디자인은 없다는 것이다. 그건 순전히 취향의 문제다. 박물관은 대중을 교육하지 않는다. 반대로 전시를 통해 대중의 요구를 수용할 수는 있다. 개인적인 바람은 런던디자인박물관을 통해 런던이 한때 창의성을 상징하는 도시였다는 걸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이다.
지금 디자인계 최대 화두는 뭐라고 생각하는가
발전의 가속화다. 전화는 40년이 걸려 나왔지만 팩스 발명에는 10년, 아이폰이 나오기까지는 겨우 몇 달밖에 안 걸렸다. 무서울 정도의 속도다. 이 속도는 결국 디자인을 죽이고 말 것이다. 소비자들은 싸구려 환각제에 중독된 것처럼 "더 빨리"를 외칠 것이고 결국 디자이너도 더 빨리, 더 새로운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란 생각이 굳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우리는 하루 만에 세상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이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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