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에 대한 국회 본회의의 체포동의 과정을 생방송으로 지켜보는 심사가 착잡했다. 개인적으로는 그를 미워하거나 변호할 이유는 없다. 그저 같이 국회 밥을 먹은 여야의원들이 압도적으로 '잡아가도 좋다'고 한 개표 결과에 맥이 풀리는 듯하던 그의 표정에서 인간적 연민을 느꼈다. 모든 혐의를 극구 부인한 그의 신상발언이나 여당 의원의 동의 찬성 토론에서는 국회의 체포동의 절차를 지나치게 거창하게 여기는 듯한 착각도 읽었다. 한편으로 '석기시대'라는 말이 돌 정도로 국민의 이목을 빨아들였던 큰 사건이 그래도 서막은 끝났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연민은 인간 본연의 정서다. 생명 현상처럼 너무 복잡하고 비정형적이어서 때로는 역설적이다. 잔혹한 범죄에 치를 떨다가도 막상 자신의 범죄가 피해자나 그 가족에게 얼마나 커다란 고통을 안겼는지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범인의 멍한 얼굴에 허탈과 연민이 함께 샘솟기도 한다. 국회가 이 의원의 체포에 동의하기까지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표출된 수많은 의견 가운데 "빨갱이 척결!" 외침이나 "국정원의 정치공작"이라는 진단을 빼면, 그에 대한 연민을 담은 언급이 적지 않았다. 인간 본래의 마음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연민보다는 분명한 정치ㆍ사회적 논거에서 비롯한 논리적 연민이 더 많았다. 가령 "내란음모 세력이라기보다는 신흥종교 집단 같다"는 진단이 전자 쪽에 가깝다면, "130명이 어떻게 내란을 일으킬까"하는 의문은 후자 쪽에 가깝다.
그런데 이런 두 가지 견해에는 공통된 착각이 담겨있다. 단순한 정서적 반응의 표출에 그친다면 몰라도, 현실의 사건에 대한 구체적 의견으로서는 작지 않은 결함이다. 두 견해는 모두 '내란'을 국어사전에 나오는 '나라 안의 난리', 즉 내전이나 민란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의원의 주된 혐의인 '내란 음모 및 선동'을 규정한 형법 90조의 바탕조항인 형법 87조의 '내란'은 일반적 의미의 내란(국토 참절)과 '국헌 문란'을 함께 가리킨다. 또 형법 91조에 따르면 '국헌 문란'은 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않은 헌법ㆍ법률의 기능 소멸, 강압에 의한 헌법기관의 전복이나 불능화다. 따라서 옴진리교의 도쿄지하철 사린가스 테러에서 보듯, 신흥종교 집단도 얼마든지 내란을 음모할 수 있다. 130명이 아니라 30명만으로도 내란음모가 가능함은 물론이다. 내란이라는 법률용어를 일반용어로 해석한 데서 빚어진 이런 혼란을 피하기 위해 법률용어를 일상어와 닮은 모습으로 다듬을 필요는 있지만, 우선은 눈앞의 착각에서 벗어날 일이다.
이런 정량적(定量的) 착각은 애교에 가깝다. 국회본회의 신상발언과 동의 찬성 토론이 드러낸 '체포동의'에 대한 정성적(定性的) 착각은 한결 심각하다. 헌법 44조의 국회의원 불체포 특권 규정은 '국회의 동의 없는' 체포나 구금을 막았을 뿐이다. 이 특권의 취지는 행정부의 부당한 억압을 차단해 의원의 자유로운 의정활동을 보장하자는 것이다. '방탄국회'라는 그릇된 관행만 아니라면, 의정활동의 장애를 막기 위한 예외적 경우에 한정된 특권이다. 따라서 정기국회 회기는 시작됐지만 국회가 공전하는 시기에 의정활동의 장애를 따질 까닭이 없다. 내란음모처럼 본질적으로 증거인멸 우려가 큰 혐의라면 두말할 나위도 없다. 더욱이 그런 혐의를 확인하거나 씻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법부가 할 일이지, 국회에서 의원들이 다툴 게 아니다. 혐의를 부인하거나 부각하려는 발언 모두가 헛되이 여겨지는 이유다. 이 의원의 체포동의가 그런 원칙과 예외의 전도(顚倒)를 바로잡는 계기가 되었으면 싶다.
하기야 위의 두 착각도 이 의원 등이 여러 차례 드러낸 시대착오적 주체사상 경도에 비하면 보름달 아래 반딧불이다. 이 의원 등에 대한 사회 일각의 연민도 사회ㆍ현실 부적응이라는 심리적 병증에 초점이 맞춰졌던 셈이다. 숱한 착각에도 불구하고 아직 연민할 수 있는 사회는 건강하다.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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