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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잃어버린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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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잃어버린 시간

입력
2013.09.05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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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책을 즐겨 읽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나이 들어서도 한결같이, 한사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즐거운 일을 하듯이 책을 읽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사람들은 독서를 하지 못하면 병이 날 것이다. 서예에 푹 빠진 사람이 붓을 뺏기면 병이 나듯이. 그런 사람들은 감옥에 가두면 더 좋아할 것이다. 다 좋으니 책만 넣어달라고 그러면서.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이 타계했을 때 그의 제자인 문학평론가 정과리 연세대 교수는 ‘이 세상을 다 읽고 가신 이’라는 제목으로 스승을 애도했다. 쉰 살도 안 된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 이 세상을 다 읽었다니! 그 치열한 다독의 삶과 박람강기의 재능이 부러움을 지나쳐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많이 읽는 것만 놀라운 게 아니라 읽은 글과 책을 통해 삶과 세상의 비의를 캐고, 쓴 사람도 미처 모르고 있던 시의 의미를 드러내준 게 놀라운 것이다. 모든 책을 다 읽어서 세상을 다 읽은 게 아니다. 많이 읽는 것만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독서를 통해 말의 질서를 다시 세우고, 난해한 것을 남들이 알기 쉽게 해주는 게 중요하다.

마르셀 프루스트(1871~1992)는 난해한 작가다. 그의 소설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누가 이야기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어렵다고 한다. 읽어본 일이 없으니 난해한지 어떤지 알 수도 없지만 남들이 하도 그렇다고들 하니 그런 줄 알아야지.

그런데 그의 대표작 를 다 읽은 사람의 글을 읽다가 나는 더 질리게 됐다.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지성이 만드는 병, 천식’은 ‘명작 속의 질병 이야기’ 열한 번째 글이다. 수필가인 산부인과원장 김애양 씨가 열심히 쓰고 있는 시리즈다.

아마도 오래전부터 번역본이 11권이나 되는 방대한 작품에 매달렸을 김씨는 천식을 매개로 프루스트의 문학과 병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씨의 분석에 의하면 프루스트가 정작 이 소설에서 하고 싶었던 말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방법에 대한 것이며 그것은 예술의 세계, 글쓰기의 세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작품 끝부분에 ‘나의 책은 콩브레의 안경점 주인이 손님 앞에 내놓는 돋보기와 같이 독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읽는 방법을 제공할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고 한다. 프루스트를 읽다보면 바로 그렇게 내 삶을 자주 반추해 보게 된다고 김씨는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다룬 이나 박경리의 , 아니면 무슨 무슨 무협지처럼 스토리가 풍부하고 극적으로 전개되는 대하소설이라면 몰라도 와 같은 소설을 어떻게 끝까지 읽지? 나처럼 이 세상엔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다고 늘 투덜거리는 사람으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어쨌든 세계 명작인데, 어디 가서 아는 체라도 하려면 한번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김씨의 글은 나에게 이런 초조감을 안겨주었다. 그래서 우선 ‘도움닫기’로 마르셀 프루스트에 관한 입문서를 찾다가 150여 쪽에 불과한 를 알게 됐다. 잉그리드 와세나르(여)라는 호주 시드니대 불어과 명예교수(2005년 당시)의 책을 번역한 것이다.

검색을 더 하다 보니 30분 만에 읽는 건 프루스트만이 아니었다. 그 책은 어떤 출판사가 기획 출판한 ‘30분에 읽는 위대한 사상가 시리즈’ 중 하나였다. 그러면 이게 어떻게 되는 거야? 30권이 다 번역서인데 원저자들 모두가 처음부터 30분에 읽을 수 있게 책을 쓰지는 않았을 거고, 역자들이 축약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를 읽은 사람이 어떤 대목을 예로 들며 “이 문장이 프루스트가 쓴 건지 와세나르가 쓴 건지 번역자가 쓴 건지 헷갈린다.”고 말한 독후감까지 읽게 됐다. 게다가 이 사상가 시리즈에는 예수 부처 플라톤 니체 마르크스 달라이라마 앤디 워홀, 이런 사람들 외에 히틀러까지 들어 있었다.

히틀러도 위대한 사상가라구? 아니 이게 무슨 망발이야? 이러다 보니 를 읽지 않을 핑계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길고 지루한 책을 읽지 않아도 삶을 반추할 일과 기회는 얼마든지 많지 않을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거야 사람마다 방법이 다를 수 있지 않겠어?

이런 과정을 거쳐 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일을 그만두거나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이 중대한 결정을 하는 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언젠가 그 작품이 절실하다고 생각되면 스스로 책을 잡겠지. 아암, 뭐든지 다 때가 있는 법이야.

그런데 한 가지 아쉽고 약 오르는 게 있다. 김애양 씨처럼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 그 내용을 내 머릿속에 그때그때 집어넣어 주는 방법은 없을까?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칩을 개의 몸에 주입하듯이 그렇게 쉽게. 그러면 나는 직접 책을 읽지 않고도 어디 가서 아는 척 하고 폼 잡기 참 좋을 텐데. 그거 참!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 fusedt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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