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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9월 5일] 한국전쟁과 '이석기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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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9월 5일] 한국전쟁과 '이석기사태'

입력
2013.09.04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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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춘 교수의 새로 나온 책 를 읽었다. 이 책은 2005년 11월부터 약 4년 간 저자가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했던 경험을 기록하고 있다. 2000년에 나온 에서 이미 저자는 한국전쟁에 대한 국가의 공식적 담론을 비판하고, 이데올로기를 떠나 남북한 민초들의 체험으로서 한국전쟁의 의미를 탐구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민간인학살과 관련된 '국가폭력'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다.

온 나라가 '이석기 블랙홀'에 빠져 있던 지난 며칠 간 나는 이 두 권의 책을 읽으며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새삼 뼈저리게 느꼈다. 미국과 북한 간의 휴전체제가 평화체제로 바뀌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이 책들에서 말하는 대로 '한국전쟁은 민주화 이후에도 지속되는 한국의 지배질서, 권력행사의 원형'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진행 중이다.

김교수에 의하면 대한민국은 민간인학살과 관련하여 희생자들과 유족을 네 번 죽였다. 직접 학살이 첫 번째이고, 4ㆍ19 이후 있었던 유족회활동과 진상규명 요구를 5ㆍ16 이후 폭력으로 짓밟은 것이 두 번째이며, 그 후 유가족을 연좌제로 묶어 1980년대까지 탄압한 것이 세 번째였다. 그리고 민주화 이후에도 대통령만이 상징적인 사과를 했을 뿐, 국방부 경찰 등 어느 가해기관도 사과한 적이 없고, 유족들의 진상규명 요구를 계속 묵살하고, 교과서나 언론에서 그 내용을 알리지 않고 있는 것이 네 번째로 죽인 것이다.

이 책에는 진실규명결정서를 받은 유족들이 보인 반응을 기술하는 대목이 있다. 결정서에는 피학살자가 살해당한 원인이 가령 '부역혐의', '보도연맹 관련', '4ㆍ3 관련' 하는 식으로 기술되었다. 그런데 통지를 받은 유족들 가운데 유독 그 부분을 삭제해달라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좌익은 탄압을 받거나 학살당할 수 있지만 우리 아버지는 절대 좌익이 아니라는 논리였다. 우리 사회에서 '빨갱이'를 비인간화하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폭력적으로 유족들을 짓눌렀는지 말해주는, 가슴아픈 이야기이다. '빨갱이'는 법도 절차도 무시한 채 죽여도 된다는 것이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학살의 논리였고, 그것은 비극적인 우리 현대사 속에서 온국민에게 내면화되었다.

그런데 지금 '이석기 사태'와 관련해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이 점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국정원은 대선개입 혐의가 분명해지고 국정원개혁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자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했고, 이번에는 공안사건 수사를 앞세워 녹취록을 언론사에 흘리고, 피의사실을 공표하는 등 명백한 위법행위를 저질렀다. 지금 국정원이 저지르고 있는 행동은 국기문란, 위법, 탈법행위에 해당하지만, 5월 합정동모임에서 있었던 일은 내란예비음모는커녕 도무지 현실성 없는 얘기들을 중구난방 떠들어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녹취록 어디를 보아도 내란음모를 결의한 일도 없고 실행에 옮길 구체적 계획을 한 일도 없다. 국정원이 저지른 해악과 범죄행위에 비하면 이석기 등이 저지른 행동은 실제적인 위험과는 거리가 멀다. 이들이 보여주는 빗나간 현실인식, 북한 지배체제에 대해 보여주는 무비판적 태도 등은 '정치시장'에서 국민들이 판단할 일이고, 이석기의원은 국회의원으로서 자신의 발언에 대해 책임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

더 크고 확실한 범죄행위를 저지른 국가기관이 내란음모죄를 걸어 자신의 범죄행위를 덮으려 하고 있는데도, 실은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다들 그 블랙홀 안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빨갱이' 이석기, '빨갱이' 통합진보당은 민간인학살의 언어로 말하자면 죽여도, 없애버려도 되나?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학살로 죽어간 사람들과 이석기 등을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결국 반공주의 권력이 만들어놓은 자장 안에 들어가서 죽기 살기로 싸우는 꼴은 한국전쟁 당시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60여 년 전의 민간인학살과 한국전쟁은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의 역사로 시퍼렇게 살아 있다.

박경미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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