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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이기고 싶다면 모든 것에 져라" 무장해제로 무장한 시인의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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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이기고 싶다면 모든 것에 져라" 무장해제로 무장한 시인의 진심

입력
2013.09.04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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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대속자'는 시인의 숙명진다는 것은 내려놓고 비우는 것 살아왔다는 것은 이미 진 것

몸으로 쓰는 시흡사 불구덩이로 뛰어든 듯 온도가 높고 강도가 센 시어들… 시적 대상에 맨살로 맞닥뜨려

미당의 토속성, 김수영의 불온성그분들과는 다른 길 모색해야 문학적 주소지 없다는 느낌 여전

당신은 져야 한다. 어디서든 어떻게든 지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것이 이 세계의 조류이건만, 그럼에도 당신은 "충분히, 늘, 잘" 져야 한다. 무엇에? "모든 것에." 왜? "그래야만 조금은 이길 가능성이 있을 테니까." 이것은 이영광(48) 시인이 네 번째 시집 (창비 발행)를 통해 하고자 했던 이야기들 중 꽤 앞자리에 올 수 있을 것 같다. '유언'이라는 제목의 시에 그는 "산 것은 진 것"이라고까지 썼다. 산다는 것, 살아왔다는 것이 이미 진 것이라는 말이다.

모두가 살려고 한다/ 나는 놀란다('오일장')

새 시집을 핑계로 만난 시인에게 진다는 것이 무언지 범속하게 물었다. "시에서든, 삶에서든, 끊임없이 자기를 내려놓고, 뒤로 물리고, 비우는 노력"이라고 그는 답했다. 문학이 세계와 싸우는 이 방식은 현실의 삶에서라고 적용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기고자 해서 우리는 언제나 이겨왔던가.

이 시인은 어디선가 "지금은 힐링(healing)이 아니라 허팅(hurting)이 필요한 때"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유난히 병과 상처에 집중할 뿐 아니라 심지어 선호하기까지 한다. "나는 왜 병이 좋은가" 자문하고, "나는 모든 자폭을 옹호한다/ 나는 재앙이 필요하다/ 나는 천재지변을 기다린다"('저녁은 모든 희망을')고 선언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병들지 않으면 낫지도 못해/ 그는 병들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전력을 다해/ 가만히 멈춰 있기죠"(같은 시) 그에게 전력(全力)은 무력(無力)의 동의어다. 불필요한 힘을 제거한 탈력(脫力) 상태가 오히려 더 강할 수 있다는 게 그의 믿음이다.

나에겐, 무장해제로 무장한/ 무적의 진심이 있네/ 죽음밖엔 적은 적 없는데/ 내 책은 늘 삶으로 가득했네('치매였을까')

그래서일까. 시인이란 게 본래 우리 고통의 대속자이기는 하지만, 이 시인에게는 내가 버젓이 살고 있다는 게 공연히 미안해질 만큼 유독 그런 인상이 강하다. "시 쓰기라는 것도 처음에는 저 좋아서 시작하는 일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단계에 들어가면 시인의 정체성이 그를 물들인다. 고통의 대속자, 맞다. 잘 모르고 시작하지만, 쓰다 보면 그런 시인의 숙명을 느끼게 되고, 이런 저런 고심과 저울질 끝에 받아들이게 된다. 사회적 대가랄 것도 없다. 하지만 가치 있는 길이므로, 이 고통에 정열적으로 승복하게 된다. 진짜 시인이라면 이에 하등의 의심과 불만을 가질 수 없다. 그런 태도가 없다면 제대로 된 시를 쓸 수도 없다."

2011년 미당문학상 수상자 선정 이유에서 나온 "미당의 토속적 서정성과 김수영의 불온성을 동시에 발견하게 되는 경이"라는 표현은 이후 이 시인을 수식하는 일종의 상투어구가 되었다. 그가 몸으로 시를 쓴다는 시단의 평가도 아마 이와 연관돼 있을 것이다. 흡사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듯, 언어의 온도가 높고 강도가 센 것 역시 이 시인의 특징이다.

"'온몸의 시학'으로 시를 쓴 김수영뿐 아니라 미당도 몸으로 시를 썼다. 미당 초기시야말로 육성으로 가득한, 몸에서 길어 올린 시다. 하지만 그분들과는 다른 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나. 저에게 분명한 문학적 주소지가 없다는 느낌이 여전하다. 이번 시집으로 바닥까지 쳤다. 한동안은 뭔가를 모색해야 하는 시기다."

그에게는 시와 시인의 관계가 매개의 거리를 최소화하며 밀착돼 있다. 시의 진술이 그대로 시인의 삶이라고 자꾸 오해하게 된다. "고독이 안되자 그는 삶을 물어뜯었다/ …죽음이 안되면 죽음을 여의어야 했는데/ 삶을 버렸다"('하지만') 같은 구절에 관조의 거리 같은 것은 없다.

"시의 소재가 되는 삶이나 체험들을 시적 기법을 동원해 가공하는 데 특별히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직입(直入)하려는 편이다. 맨살로 맞닥뜨려서, 그 맞닥뜨림 속에서 나오는 말들을 선호한다. 명징한 의식을 버렸을 때 느닷없이 찾아오는 말들. 시적 대상과의 거리를 잃고 대상에 끌려가려고 애쓴다. 하지만 거기에 어떤 허위, 과장은 없는 걸까 늘 마음에 걸린다. (결과로 볼 때)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고자 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살려고 발버둥 치지 않은 것,/ 그것이 나의 발버둥이었지만 오일장엔 아예/ 발버둥이 없다…/모두가 살려고 한다/ 나는 놀라지 않는다('오일장')

시인은 오일장이 선 시장에 갔다가 삶 자체에 여념이 없는 삶을 보고 감명을 얻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이해 관계에 초연한 듯 많은 걸 버리고 사는 삶을 살았다는 게 자랑까지는 아니었지만, 아등바등 살아가는 현실의 사람들처럼 그에게 낯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날 상인들을 보면서 "각박한 마음의 움직임 자체가 그들 내부에서는 잊혀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혹여 시인이 해답을 줄 수 있다면, 이 시인이 제시하는 답은 바로 이거다. "이 생이 이렇게 간절하여 나는 살고 싶으니,/ 자꾸 죽자 자꾸 죽자/ 죽기 전에"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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