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나는 금요일이 되면 오후 10시 전에 집에 들어와 만사를 팽개치고 리모컨부터 찾던 시절이 있었다. 케이블에서 방영하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의 본방사수 때문이었다. 프로그램 도중에 방송에 문자를 보내는가 하면 끝나기가 무섭게 인터넷으로 프로그램을 검색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자리에서 당연히 나오는 개그 콘서트 유행어도 잘 모를 정도로 유행 프로그램에 둔감했던 내가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일주일 내내 TV 프로그램을 기다리다니. 그것도 본방사수까지 외쳐가면서. 일요일이면 새벽같이 일어나 챙겨 보던 디즈니 만화동산 이후로 그렇게 악착같이 챙겨 본 프로그램은 그 프로그램이 처음이었다. 매회 다른 지원자와 경쟁하며 성장하는 지원자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고, 심사 중에 나오는 60초 광고가 얄미워 벌떡 일어나 화를 내며 안절부절 했었다. 그 시절 나는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60초 광고도, 등장할 것처럼 초반부터 기대감을 심어놓고 결국 다음 주 예고로 때우는 편집도, 다 참아가며 또 한번 시청자 문자투표에 참가했다. 그때 그 마음 얼마나 뜨거웠던가. 그런데 시즌이 계속되면서 어느 순간부터 뜨겁던 마음이 시들해졌다. 아니 차가워졌다. 최근에 새로운 시즌을 시작한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게 되었고, 지난 시즌들을 다시 보기로 차근차근 살펴보며 내내 마음이 불편했었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2009년을 시작으로 많은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 시작되고 폐지되었다. 지금도 새로운 포맷, 색다른 직업군을 선택한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만들어진다. 진행 방식은 초창기인 2009년과 거의 같다. 자극적이고 독특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 뛰어난 실력자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사연을 가진 사람들을 나열한 예선에 독설이 양념처럼 뿌려지고, 본선에 진출한 지원자들이 경쟁에서 하나씩 떨어지는 형식은 여전하다. 절실함, 노력, 열정 같은 말을 품은 독설에 가까운 심사평이 지원자들과 화면 건너의 시청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도 여전하다.
하지만 프로그램들은 시즌이 진행될수록 점점 자극적으로 변하고 있다. 전 시즌보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편집과 거친 독설을 표방하며 자칫 식상해할 수 있는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 두는 것이다. 이쯤 되니까 왜 그토록 뜨겁던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이 식었는지 알 수 있었다. 보는 내내 흥행을 위해서 지원자들의 본모습과 사생활이 편집되고 거침없이 노출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꿈을 실현하기 위해 지원한 지원자들이 상품화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얘는 구려.", "얘는 여기서 끝이야."… 방송 중에 나오는 심사위원들은 툭하면 독설을 한다. 독설이란 받는 자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이 받침 되어야 상대가 크게 자라는 거름이 되지 않을까. 심사위원의 자극적인 독설과 참가자들의 인권을 생각하지 않고 재미만을 위한 일명 '악마의 편집'이 정말 꿈을 이뤄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까. 방송사 쪽에서는 참가자가 방송 출연시에 동의서를 확인하고 받았으니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동의서의 내용은 대략 프로그램의 제작 및 방송을 위하여 본인의 초상 및 음성이 포함된 촬영 부분을 편집, 변경, 커트, 재배치 또는 수정한 내용을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하지 않거나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지 않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배고프지? 내가 사탕 줄게 먹을래? 그 대신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무조건 다 참아,라는 말과 뭐가 다를까.
오랜 시간 준비한 참가자들에게 서바이벌 오디션은 절박한 기회일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참가자들의 꿈을 실현시켜 준다는 간판을 내걸고 너무 적나라하게 장사만 하는 건 아닌지 의심된다.
"제 점수는요. 방송사에서 참가자들의 인권을 더 보장해주면 공개하겠습니다."
천정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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