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째 신문을 도배하다시피 하는 통합진보당의 이른바 'RO(Revolution Organization)' 사건 기사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내란음모'에서 시작해 '폭탄' '총기' '전쟁 준비' '전기통신 분야 타격' '혁명의 교두보' 등 공안 당국이 수집했다는 자료를 토대로 한 기사의 제목들이 한결같이 섬뜩하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런 단어들을 접하고도 내란이 일어나 한국 사회가 혼돈에 빠질 것 같다는 불안도, 나라가 '빨갱이'들에 점령될지 모른다는 공포도 느껴지지 않는다. 용어 자체에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지만 신문들이 굵은 활자로 과감하게 뽑아 쓰는 그 말들에서 마땅히 전달되어야 할 현실감을 느낄 수 없다.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이번 사건의 중심으로 거론되는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이 이미 셀 수도 없이 종북 논란에 휩싸였던 인물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회주의 정부 건설을 목표로 했다는 민족민주혁명당 사건으로 실형까지 살았고 애국가 제창 거부 등으로 의원 자격심사를 받아야 하니 마니 구설에도 올랐으니 이번 사건은 뭐 그리 대단한 뉴스가 아닐 수도 있다.
30여년만에 부활했다는 '내란음모죄'가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공안 당국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던 죄명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김대중은 이 죄명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돼 사형선고까지 받았지만 대통령이 됐고 결국 무죄 선고를 받았다. 'RO' 사건을 발표한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가 1974년 소위 '인혁당 사건'에 적용한 '내란 예비ㆍ음모' 혐의도 조작으로 드러났다.
더 직접적으로는 'RO'의 조직원들이라는 사람들이 쏟아냈다는 말들이 마치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처럼 들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전쟁의 위협이 임박했다는 그들의 현실 인식에 전혀 공감할 수 없는데다 장난감총을 개조해 총기를 만들겠다거나 압력밥솥으로 폭탄을 만들어 무장한다는 이야기들은 골목 전쟁놀이 수준의 대화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 같은 무장으로 국가기간망에 어떤 타격을 줄 수 있을지, 내란음모가 맞다면 실현되어야 할, 국토를 참절(斬截)하고 국헌을 문란하게 할 폭동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할 수 없다.
무엇보다 'RO' 사건에서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국가정보원이 선거 개입을 심각하게 의심 받아 국정조사와 검찰수사를 받았거나 받고 있고 천주교 등 종교단체, 80여 대학 교수 등의 국민적인 규탄을 받는 중에 이 사건을 발표했다는 점일 것이다.
대선 댓글 사건을 종북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심리전의 일환이라고 주장하는 국정원은 여당 핵심 의원들까지 거들고 나선 '국정원 개혁' 요구를 피해가려고 갖은 방법으로 저항하고 있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느닷없는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가 그렇고, 이례적으로 대변인 성명까지 발표해 '국가안보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며 노무현 정권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포기했다는 정치평론까지 해대는 행태가 그렇다.
최근 야당 대표가 국정원과 'RO' 사건을 함께 겨냥해 "누구든 민주주의를 훼손한다면 결연하게 싸우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한국의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있는 것은 정녕 누구인가. 방위비 지출이 남한의 5분의 1, 경제력은 40분의 1 수준에 불과한 공산주의 북한일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 도처에 뿌리 내리고 있다지만 툭하면 여론의 뭇매를 맞는 자생적 빨갱이들인가? 아니면 선거 개입을 본연의 임무라고 둘러대며 개혁 요구를 피해가기 위해 이제 정치까지 좌지우지 하려 드는 정보기관일까? 공안 당국의 수사 자료를 하나라도 더 챙기려고 경쟁하기 전에 언론도 'RO' 사건의 본질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 볼 일이다.
김범수 문화부 부장대우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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