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댓글 활동 등의 실무 책임자였던 민병주 전 국정원 심리전단장이 일부 사이버 활동에 대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지시가 있었음을 사실상 인정했다.
2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부장 이범균) 심리로 진행된 원 전 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두 번째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민 전 단장은 "부서장 회의에서 나온 원 전 원장의 지시 내용을 일부 업무에 반영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8월 27일 국제신용평가기관 무디스가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상향조정한 다음날부터 심리전단 직원들이 일반인을 가장해 온라인 홍보에 나섰던 것에 대해 "정확한 배경은 기억나지 않는다"면서도 "원 전 원장이 어떻게든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겠냐"고 말했다. 9월 21일로 예정된 다음 부서장 회의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원 전 원장이 모닝 브리핑 등에서 내린 사실상의 지시를 받아 '국정홍보'에 나섰다는 뜻이다.
검찰은 이날 심리전단의 활동을 하나하나 지목하며 민 전 단장에 대한 공세수위를 높였다. 검찰 측은 '종북의 기준이 뭐냐'는 질문에 민 전 단장이 "다른 데는 있는지 몰라도 잘…"이라며 말을 흐리자 "기준, 범위 없이 공작부서 임의로 (활동이) 진행될 경우 100% 선거 개입이 이뤄질 수 있다"고 몰아쳤다. 이어 "(심리전단 활동 목적이) 종북 좌파 척결이라면 그 대상이 얼마나 명확한가가 핵심이다"라고 말했다. 검찰 측은 또 "국정원이 북한의 대남 선전ㆍ선동 활동에 대처하기 위해 사이버 활동을 했다면 국정원의 의견임을 공표하지 않고 일반 국민인 것처럼 의견 개진한 이유는 무엇이냐"고 따지기도 했다.
이날 공판에서는 국정원 심리전단이 트위터 활동에 나선 것이 2011년 10ㆍ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나경원 새누리당 후보가 '1억원 피부과' 논란에 휩싸인 것이 계기가 됐다는 정황도 드러났다. 원 전 원장은 당시 선거를 닷새 앞두고 부서장 회의에서 "종북세력을 인터넷에서 끌어내려야 한다"고 말했으며, 선거 후인 11월 18일 회의에서는 "선거 정국을 틈타 종북세력이 활동한다"며 트위터 대응 강화를 주문했다.
다만 민 전 단장은 "'원장님 지시ㆍ강조 말씀'에 나오는 '진보정권 수립 저지'와 같은 부분은 북한의 선거 개입 및 유언비어 유포 등에 잘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며 "선 거개입 지시는 없었다"고 거듭 주장했다. 그는 또 경찰 수사결과 드러난 심리전단 직원들의 특정 대선 후보 지지ㆍ비방 글에 대해 "특정 후보를 직접 거명하라는 지시는 내려간 적이 없다. 직원 개인의 국가 정체성에 의해 진행된 것인지 (따로) 확인해 봐야 한다"며 조직적 개입 의혹을 전면 부정했다.
민 전 단장은 이날 공판에서 오락가락하는 답변으로 의구심을 사기도 했다. 그는 국정원 여직원 김모씨가 오피스텔에 있던 당시 "감금상태라 출근할 수 없다는 원론적인 내용만 보고받았다"고 진술했다가 검찰 측이 "정보기관 직원이라면 당시 상황을 보고하고 지침을 기다리는 게 맞지 않냐"고 반박하자 "그랬을 것"이라고 말을 바꿨다. 김씨가 경찰에 노트북 등을 임의 제출하기 전 187개의 파일을 삭제한 사실에 대해서도 검찰 측이 "김씨가 국정원 직원들과 여러 차례 통화했는데 당연히 책임자인 민 전 단장에게 보고가 간 것 아니냐"라며 추궁하자 "당시 하도 어수선해 상황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얼버무렸다.
이날 공판은 방청석에서 민 전 단장의 얼굴을 볼 수 없도록 증인석 뒤편에 차단막을 설치한 채 진행됐다. 원 전 원장 측 변호인은 "신문을 비공개로 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9일로 잡힌 다음 기일에는 이종명 전 국정원 3차장이 증인으로 출석할 예정이다.
조원일기자 callme1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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