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가 아직도 화젯거리다. 우경화하는 일본에 대한 엄중한 메시지를 일본국민과 그네들 정치지도자를 분별하는 깊은 사려에 담아 전달하며 대한민국 외교의 격조를 높였다는 평가가 중론이다. 한편 같은 경축사에서 밝힌 통일이라는 새로운 국정기조에 대해서는 또 다른 평가도 있는 듯해 우려된다. 통일의 명분을 지렛대 삼아 복지와 경제민주화라는 취임 후 첫 6개월의 국정기조를 바꾸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의심의 목소리도 조심스레 들려온다.
오비이락이라 했던가. 안 그래도 얄궂은 증세논쟁부터 철지난 경제성장 우선론에 이르기까지 온갖 설익은 생각들이 난무하는 시점이다. 국정전면에 등장한 주역들의 얼굴에서 솥뚜껑 대신 자라를 보며 화들짝 놀라는 일부 여론의 소심한 향배도 사시(斜視)할 일만은 아니다. 하루아침에 거위가 되어버린 우리 국민의 속내가 어찌 편할 리 있겠는가.
통일을 위해 복지를 재고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분명 설득력이 있다. 다가오는 통일비용을 계상할 때 섣부른 복지지출은 장기적으로 국가재정의 파탄을 야기할 수 있다. 허나 반론의 논거도 만만치는 않다. 상대적으로 젊은 북한인구의 대거편입이 때 이른 고령화의 문턱에 서있는 우리 사회의 복지재정 부담을 완화시켜 줄 수 있다는 주장이 바로 그 것이다. 경제전문가가 아닌 이상 단언할 수는 없으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통일과 복지의 주판알은 이제부터 튕겨봐야 한다는 사실이다.
본격적인 셈을 놓기 위해서라도 지금 당장 필요한 사전 정지작업이 하나 있다. 통일과 복지를 선순환시킬 수 있는 국가비전을 가다듬는 일이다. 당장 두 마리의 토끼를 쫓자는 말이 아니다. 정책의 우선순위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허나 헌법에도 나와 있듯 통일한국의 국시(國是)가 자유·민주·복지에 있다는 국정철학의 재천명, 그 원칙에 입각한 완급조절을 국민에게 설득하고 이해를 호소하는 노력이 지금부터 끽긴하다는 점을 지적하려 함이다.
더군다나 그런 국가비전이 우리 사회에 없어왔던 것도 아니다. 일례로 제1세대 한국정치학계의 태두이자 고려대 총장을 역임한 김상협 전 총리는 일찍이 단순한 재통일이나 흡수통일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건설, 새로운 국민형성을 통일의 지표로 주창했다. 미래지향적, 역사창조적인 그 '새로운 통일'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북쪽도 반드시 오지 않으면 안 될 광장, 바로 '자유복지사회'라는 광장을 제시한 바 있다. '7·4 남북공동선언'을 예견이라도 한 듯 그 한 해 전인 1971년에 나온 명강(名講) '수정주의의 시대'에서였다.
이제 다시 도약대에 선 한국일보의 전성기를 열고 이끌었던 당대의 명칼럼니스트는 훗날 선배지성의 깊은 속을 이렇게 풀어썼다.
"그러므로 통일을 하자면 합의 가능한 통일지표-민주사회·복지사회 - 에 더욱 가까워지도록 남도 변하고 북도 변해야 한다. 민주화가 곧 통일의 명제로 되는 것이다. 때문에 통일을 빙자하여 민주화를 후퇴시킨 유신(維新), 선(先)통일을 앞세워 민주 질서를 뛰어넘는 심정적 무조건 통일론은 반(反)통일로 규정된다."
박근혜정부가 통일로 복지를 덮으려 한다는 음모론은 믿지 않는다. 통일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어느 때보다 미약한 지금 다시 한 번 국시를 다잡는 건 불과 6개월 전 헌법수호를 서약하며 취임한 대통령의 당연한 책무다. 그렇지만 일각의 기우도 이해는 간다. 통일과 복지를 아우르는 일관된 국정철학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웅숭깊은 그 뜻은 대한민국 헌법에 그리고 선각자들의 심모원려 속에 면면히 흘러왔다. 그래서 전성기의 한국일보는 위 칼럼의 끝에 가서 이렇게 당부하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통일의 마지막 큰 길은 어디까지나 민주화에 있는 것임을 되새겼으면 한다."(1990년 6월9일자 김창열 칼럼 '통일지표' 중에서)
김성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ㆍ정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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