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9월7일 새벽 어둠을 뚫고 일본 지바 형무소의 육중한 철문이 열렸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초로의 사내는 커다란 안경을 벗고 뒤를 돌아보더니 착잡한 표정으로 공항으로 향하는 호송차에 몸을 실었다. 그가 향한 곳은 현해탄 건너 대한민국. 재일 한국인으로 태어나 71년 만에 처음 밟아보는 낯선 곳이었다.
그의 이름은 권희로. 92년 유인촌이 열연한 영화 '김의 전쟁'으로 인해 김희로로 더 알려진 한 많은 인생은 우리 민족과 재일 한국인의 수난사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28년 시즈오카현 시미즈시에서 한국인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권희로는 극심한 차별과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자랐고, 의붓아버지의 성을 따라 김씨로 성을 바꿨다. 일본 학생들의 왕따에 소학교를 그만두고 사회의 천대 속에 감옥을 드나들며 젊은 시절을 보내던 그는 40세 되던 해에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다.
68년 2월20일 밤 시미즈시 클럽 밍크스에서 총성이 잇달아 울려 퍼졌다. 빚 독촉을 받던 권희로가 자신에게 "조센징, 더러운 새끼"라고 욕설을 하는 야쿠자 조직의 두목과 부하를 향해 모멸감을 참지 못하고 엽총을 발사한 것이다. 야쿠자 둘을 살해한 그는 실탄을 챙겨 후지미야의 한 온천여관으로 달아나 투숙객 13명을 잡고 경찰과 대치했다. 장장 88시간에 걸친 인질극은 일본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던졌고, 그는 현장에서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대우와 멸시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며 울분을 쏟아냈다. 인질극을 지켜보던 어머니 박득순씨는 아들에게 한복을 건네며"일본인에 붙잡혀 더럽게 죽지 말고 깨끗이 자결하라"고 당부했다. .
대치 나흘째, "조센징"발언에 대한 시즈오카현 경찰본부장의 사과를 받아낸 그는 체포된 후 혀를 깨물며 자결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이후 31년에 걸친 기나긴 수감생활이 시작됐다.
모범수로 생활하며 교도소 표창을 수 차례 받았지만 번번이 가석방 대상에서 탈락하는 김희로를 보며 국내외에서 구명운동이 시작됐으며, 특히 후견인으로 나선 박삼중 스님은 누구보다 그의 석방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10만명이 넘는 서명과 탄원서가 접수됐고 한국과 일본의 언론을 통해 김희로 사건이 연일 재조명되자 일본 당국은 결국 재입국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의 석방을 결정했다.
마침내 99년 9월7일 오후, 칠순 노인이 되어 바깥 세상을 마주한 김희로는 31년 6개월의 옥살이를 마치고 꿈에 그리던 어머니의 고향을 찾아 김해공항에 발을 디뎠다. 그의 품에는 이미 숨을 거둔 어머니의 유골함이 태극기에 싸여 있었다.
귀국 후 주위의 배신과 사기 등으로 고달픈 삶을 이어가던 그는 2010년 부산의 한 병원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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