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사색의 향기/9월 3일] 지금 이 순간을 사는 법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사색의 향기/9월 3일] 지금 이 순간을 사는 법

입력
2013.09.02 12:01
0 0

무섭게 타오르던 여름의 기세가 시들해졌다. 저녁 바람에 서늘한 기운이 어리고, 한낮의 태양도 제법 풀이 죽었다. 한여름에 태어나서인지 무더위가 싫지 않았는데 올 여름은 내게도 버거웠다. 4층 건물의 꼭대기에서 선풍기 한 대로 나는 여름이 해가 갈수록 곤욕스럽다. 지구가 심하게 앓고 있음을 매년 실감한다. 게다가 올해는 나도 좀 아팠다.

10년간 무거운 배낭을 메고 세계를 떠돈 대가로 얻은 디스크가 차도를 보이나 싶었더니, 오른팔이 고장 났다. 오른손으로는 책도 한 권 들 수 없는 날들이 두 달째다. 휴식도 없이 몇 달 간 몸과 마음을 혹사시킨 탓이란다. 여행에서 진 빚을 갚겠다고 원고 청탁과 강연 요청을 가리지도 않고 다 받아들였다. 마치 '노'라고는 답할 수 없도록 프로그래밍 된 로봇 마냥. "요즘 어떻게 지내?" 누군가 물어오면 "빚 갚는 재미에 살아요"라고 답하며 봄과 여름을 보냈다. 그 와중에 옥상 텃밭을 가꾸는 '도시 농부'의 자긍심도 포기하지 못했고, 뒤늦게 살림에 재미가 붙어 온갖 잼과 저장식품을 만드느라 몸을 과하게 쓰긴 했다. 평생을 설렁설렁 살다가 갑자기 슈퍼우먼 코스프레를 했으니 탈이 안 나면 그게 이상했을 것이다.

문제는 몸이 아프니 마음이 덩달아 무너지는 일이었다. 다음 달 수입을 예상할 수 없는 프리랜서의 삶이 새삼 무겁게 다가왔다. 복지제도가 약한 나라에서 나 같은 이는 아프면 바로 가난한 가족의 민폐가 될 터였다. 처음으로 미래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나이 마흔이 넘도록 가진 것이라고는 월세 낀 전세에, 빚만 쌓인 통장과 병든 몸이라는 내 처지가 서글펐다. 어쩌자고 나는 이 나이 되도록 이렇게 가난한 걸까. 나는 어느새 안 하던 짓을 하고 있었다. 남들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고, 남들의 삶과 내 삶을 비교하는 일을. '이 빚을 다 갚고 나면 새 빚을 내서 여행을 떠나야지' 하던 철없음이 주눅 들었다. 이제부터라도 알뜰히 모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내가 세상을 떠돌며 배운 게 무엇인가. 지금 이 순간을 사는 법이었다. 내가 가진 유일한 재산은 '지금 여기 파워'(here and now power)다. 길 위에서의 삶은 배낭 하나에 일 년간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넣고 다니는 일이다. 모든 게 부족하기만 하다. 내게 없는 것을 원하는 순간, 여행은 고생길이 될 뿐이다. 그러니 오늘밤 내게 주어진 잠자리가 가장 아늑한 잠자리이고, 지금 내가 먹는 음식이 가장 맛있는 요리고,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내가 지닌 가장 좋은 옷이고, 내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된다. 지금 내게 주어지는 것들에 매 순간 감사하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다보면 어느덧 깨닫게 된다. 살면서 필요한 물건이라는 게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을, 안락한 미래란 물질적 준비로 갖춰지는 것이 아니라 충만한 현재를 사는 데서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더 나아가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을. '덜 갖되, 더 충실한 삶'을 살아갈 힘, 모두가 같은 길을 걸어간다 해도 나 혼자 등 돌려 다른 길을 갈 힘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지난 10년 간 길 위에서 내가 배운 것은 현재를 긍정하는 법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여름 내내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여행가가 여행도 못 가는 처지가 억울하다고, 내 몸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칭얼거렸다. 나는 여전히 참 많은 것을 가졌는데도 말이다. 무엇보다 내게는 엄마에게 물려받고, 여행을 통해 단련시킨 '행복 감수성'이 있다. 작은 것에 기뻐하고, 사소한 일에 감사할 줄 아는 예민한 더듬이가. 써지지 않는 글 때문에 좌절하다가도 좋은 책 한 권에 위로를 얻고, 맛있는 밥 한 그릇에 살아갈 힘이 생겨나고, 길가의 잘 늙은 나무 한 그루에 고요해지는 단순한 마음결을 아직 지니고 있다.

여행을 떠날 수 없는 요즘. 여행자의 시선으로 내가 사는 곳을 둘러봐야겠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삶의 아름다움은 이곳에도 가득하다. 때마침 가을이다. 들판의 곡식이, 숲의 나무가 결실을 맺는 기적으로 온 산하가 우렁우렁한 계절이다. 눈을 크게 뜨고 귀를 한껏 열고 일상의 작은 기적을 찾아가야겠다.

김남희 여행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