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면이 먹고 싶어 중국집에 갔다. 손님이 없는 늦은 오후라 문은 활짝 열려 있고 낡은 벽걸이 선풍기가 탈탈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TV가 보이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내게 짜장면을 내준 주인도 주방에서 일거리를 챙겨와 옆 테이블에 앉았다. 쟁반과 칼과 무.
TV에 눈을 고정한 채 그는 빠르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무를 토막 낸 후 슥삭슥삭 칼집을 넣었다. 금세 꽃 한 송이가 만들어졌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오호라. 탕수육이나 팔보채 같은 요리에 올라갈 장식이로구나. 주인의 능란한 손놀림을 흘낏거리고 있자니, 그동안 내가 배달시켜 먹었던 탕수육 접시들에 생각이 미쳤다. 그 꽃장식들을 어떻게 했더라. 생각이 나지 않는다. 생각이 나지 않는 걸 보면 그냥 음식물 쓰레기에 섞어 버린 것 같다.
이제 와서 그 무심함이 딱히 마음에 걸리는 건 아니다. 버리지 않으면 어쨌겠는가. 먹기라도 했을까. 탁자에 올려두고 감상이라도 했을까. 다만 모종의 유감이 스쳐가긴 한다. 꽃은 눈길을 얻지 못한다. 눈 따로 손 따로, 주인장은 자신이 '조각'하는 꽃이 아니라 TV 속의 유재석을 보고 있다. 상에 오른 후에도 꽃은 눈길을 끌지 못할 것이다. 젓가락에 이리저리 채이다가 뜸물통에나 처박히겠지. 무심함 속에서 만들어져 무심함 속으로 가는 꽃. 그래도 꽃이랄 수밖에 없는 꽃이, 저기 있는 것이다. 수선스럽게 혹은 흐뭇하게 둘러앉은 이들의 한 끼를 잠시 단장하기 위해.
신해욱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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