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교육부가 2017학년도부터 인문ㆍ자연계열 통합 수능을 치르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밝히면서 문ㆍ이과 구분 폐지가 교육계의 쟁점으로 떠올랐다. 학문 간 경계가 사라지는 통섭의 시대에 학생들을 문ㆍ이과로 나눠 교육하는 현재의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는 취지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이들이 많지만 교육현장에서는 학생들의 학력 저하, 교사 준비 부족 등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많다. 문ㆍ이과 통합 교육이 왜 필요한지, 이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제가 선결돼야 하는지 등을 살펴본다.
서울 중위권 대학 3학년생인 박진혁(26ㆍ가명)씨는 요즘 졸업 후 진로에 대한 걱정이 부쩍 늘었다. 고교 때 수학이 약해 문과를 택했고, 수능 성적에 맞춰 경제학과에 진학했지만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생물 과목을 좋아했던 터라 생명과학 쪽으로 전과(轉科)할 생각도 해봤으나 교과과정을 못 좇아갈 것 같아 포기했다. 현재 그는 노량진 학원가를 기웃거리며 공무원 시험에 대해 알아보고 있다. 박씨는 "진로 선택의 폭이 문ㆍ이과로 확연히 갈려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할 수 없게 돼 버렸다"고 말했다.
융합과 통섭의 시대가 왔지만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은 여전히 문ㆍ이과라는 이분법적 틀에 갇혀 있다. 1963년 제2차 교육과정 때 도입된 고교 문ㆍ이과 구분 시스템은 반세기 동안 글 못 쓰는 이과생, 과학지식에 무지한 문과생을 당연시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교수는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능력과 자연현상을 이해하는 과학상식은 시민으로서의 기본 자질"이라며 "이과생은 글을 못 써도 된다는 식의 문ㆍ이과 구분 교육에는 학생을 시민이 아닌, 사회에 필요한 기능 인력으로 바라보는 산업화 시대의 시각이 깔려 있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한국사회는 과학적 사고력이 약한 문과생과 인문학적 상상력이 부족한 이과생이라는 '반쪽짜리 인재'를 키웠다. 지난 6월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국내 1,023명의 기업 인사담당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현 교육제도가 창조인재 육성에 적합하다고 답한 이는 13.7%(140명)에 불과했다. 문ㆍ이과형 인간을 따로 키우는 현재의 교육 방식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유재준 서울대 자연대 교무부학장은 "사고의 폭을 확장하기 어렵기 때문에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추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문ㆍ이과에 대한 기계적인 구분은 대학에서 자의적으로 학문분야를 제한하거나 융합학문의 싹을 밟는 등의 한계를 고스란히 노출한다. 가령 극지방 자원탐사의 최첨단에 선 해양학과는 국제법의 중요성이 점차 커지고 있지만 여전히 자연과학대학에 묶여 필요한 지식을 가르치지 못한다. 사립대의 한 인류학과 교수는 "인류학과가 다룰 수 있는 학문의 범위가 넓은데 인문계열로 분류돼 있어 여러 문화를 비교하는 비교인류학 위주로 연구가 제한돼 있다"고 말했다.
반면 해외 선진국들은 이 같은 문∙이과 구분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고교에서 문ㆍ이과 구분 없이 원하는 수업을 들을 수 있다. 이러한 토양에서 성장한 학생들은 대학에서도 학문 간 벽이 높지 않아 다양한 융합연구를 수행한다. 대학들은 학문의 발전에 따라 학과를 유연하게 재편하는 노력을 해왔다. 미국 하버드대 의대는 생명현상을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하기 위해 2004년 수학 물리학 컴퓨터공학 등을 묶은 시스템생물학과를 새로 만들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미디어랩은 정보기술(IT)을 예술과 미디어 등 다양한 분야와 접목해 '상상력의 천국'이라 불린다.
현재 문ㆍ이과를 구분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일본, 중국, 대만 등이다. 일제의 영향 아래 있던 국가들로, 식민지에서 단기간에 기능 인력을 키워야 했던 일제 교육의 잔재를 아직까지 벗지 못하고 있다.
시대적 요구에 뒤떨어진다는 지적이 이어지자 일부 대학들은 최근 들어 융ㆍ복합 학과를 신설하고, 문ㆍ이과 계열 구분 없이 원하는 전공에 지원할 수 있도록 입시 시스템을 바꾸고 있다. 서울대는 2014학년도 수능부터 공대 건축학과와 산업공학과에 한해 인문계열 학생도 지원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공대 학과 가운데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한 전공이라고 우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서울대의 한 교수는 "융합형 인재 양성이라는 도입 취지는 좋지만 공대에 진학한다고 해서 문과의 울타리 안에 있던 학생에게 융합적 사고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고등교육의 발판인 고교에서부터 문ㆍ이과 장벽을 걷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신동희 성균관대 인터랙션사이언스학과 교수는 "융합, 통섭 등의 개념이 우리사회에서 화제가 되는 이유는 그동안 학제 간에 배타적인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이라며 "문ㆍ이과형 인재가 날 때부터 따로 있는 게 아닌 만큼 행정 편의적으로 만든 문ㆍ이과 구분을 허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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