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초 일본의 진보세력을 대표하는 학자인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를 만나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지난해 연말 그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으니 8개월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와다 교수는 지난해 연말 인터뷰 당시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만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었다. 그가 그렇게 주문한 것은 박 대통령이 갖고 있는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상징성이 위안부 문제 해결에 엄청난 힘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었기 때문이다.
몇 달 만에 다시 만난 와다 교수는 박근혜 대통령 취임 6개월이 넘도록 한일정상회담이 이뤄지지 않은 것에 큰 아쉬움을 보였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한일 관계가 꼬일 것이기 때문에 박 대통령이 보다 적극적으로 정상회담을 추진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와다 교수는 만약 한일정상회담이 성사된다면 박 대통령이 훨씬 유리한 입장에서 현안을 풀어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를 테면 박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아베 총리에게 위안부 강제 동원을 인정한 고노담화와 침략전쟁을 사죄한 무라야마담화를 계승할지, 수정할지 확실하게 밝히라고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베 총리가 모호한 답변으로 질문을 피해가거나 고노담화와 무라야마담화를 부정하는 발언을 하면 국제사회의 비난을 자초, 일본의 외교적 신뢰가 추락할 뿐 아니라 자신의 정치생명도 위험해질 것이라고 와다 교수의 전망했다. 물론 아베 총리가 박 대통령에게 위안부 문제의 적극적 해결을 약속한다면 한국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와다 교수는 한일정상회담에서 박 대통령이 실제로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후자의 답이 돌아올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와다 교수와 저녁식사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의 한일정상회담 제의 목소리가 여러 갈래에서 나왔다. 아베 총리는 지난달 26일 중동 방문길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각국 정상들이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박 대통령과 대화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무장관도 이병기 주일대사와 만찬 회동을 갖고 가까운 시일 안에 정상회담을 하고 싶다는 아베 총리의 의사를 전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28일 청와대에서 재일민단 대표단과 면담하면서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이 역사를 올바로 직시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용기 있는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며 사실상 아베 총리의 대화 제의를 거부했다.
박 대통령은 아베 총리가 왜곡된 역사인식을 바꾸지 않는 한 굳이 만나서 대화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한국 정치권도 박 대통령의 생각을 대체로 받아들이는 모양새다. 지난해 12월 취임 이후 주변 국가와의 정상회담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아베 총리가 최근 정상회담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집단적자위권 행사에 필요한 헌법해석 변경 문제를 주변 국가에 설명하겠다는 속셈을 깔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정부가 회담에 선뜻 응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취임 이후 원칙을 특히 강조해온 박 대통령이 아베 총리와의 정상회담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래서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대화를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쪽이 대화의 손길을 내밀고 있고 그 대화의 알맹이가 결코 불리할 것이 없다면 적극적으로 임하는 것도 좋은 방편이다. 마침 이달부터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를 비롯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아세안+3' 정상회의 등이 예정돼있어 자연스러운 만남이 가능하다.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라면 만남의 형식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한창만 도쿄특파원 cm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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