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파 배우 김명민이 주인공을 맡은 '페이스메이커'는 누군가의 승리를 위해 30km까지만 달려주는 마라톤 선수가 "오로지 나를 위해 달리고 싶다"라며 반란을 시도하는 영화다. 페이스메이커란 중거리 이상의 경주 경기에서 기준이 되는 속도를 만들어 주는 선수로, 본인의 기록보다는 전략적으로 다른 선수를 위해 달리는 역할을 한다. 영화는 주인공이 꿈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여 마침내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이끌어내는 이야기로, 감동과 웃음을 주고자 하였다. 그런데 현실에서 페이스메이커가 자기 역할을 하지 않고 스스로를 앞세우면 어떻게 될까?
의학에서 페이스메이커는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부정맥의 치료를 위해 사용되는 인공 박동조율기를 말한다. 부정맥은 선천적 혹은 고혈압이나 흡연 등에 의해 발생하여 가슴 두근거림이나 통증, 현기증을 유발하며 심하면 심장마비로 돌연사를 한다. 체내에 설치된 페이스메이커는 심장의 상태를 감지하여 이상이 감지될 때 전기자극에 의해 심장박동을 조절하게 된다. 소형의 대용량 리튬배터리에 의해 작동되며 수명은 7년 정도이다. 최초의 페이스메이커는 외장형으로 1958년 미국에서 개발되었고 스웨덴에서 체내 페이스메이커를 처음으로 시술하였다.
그런데 심장에는 이러한 인공적인 심장박동기가 아니더라도 심장의 수축을 조절하는 페이스메이커가 정상적으로 존재한다. 우심방 벽에 위치하고 있는 심근세포로 구성된 동방결절이 바로 그것인데, 이 결절의 근세포가 수축됨으로써 심장박동이 시작되고 조절되기 때문에 페이스메이커라고 한다. 하지만 심장이 정상적으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페이스메이커만으로는 충분치가 않으며, 동방결절에서 발생한 신호가 전도체계를 통해 심장의 다른 부위로 올바르게 전달되어 조화를 이루어서 함께 작동을 하여야 한다.
이러한 페이스메이커와 작동체계는 심장 이외에 신체 다른 장기에도 존재하고 있다. 식도, 위, 소장, 대장으로 이루어진 위장관은 섭취된 음식물을 소화하고 배설하기 위하여 수축과 이완이라는 연동운동을 한다. 위장관의 연동운동에서 페이스메이커는 카할 간질세포로 음식물의 소화 정도에 따라 시간을 조절해서 위와 장의 근육을 순차적으로 움직이게 한다. 심장은 1분에 60~100회 박동하는데, 위는 1분에 3회, 소장은 10회 정도 연동운동을 한다. 시간에 관계없이 규칙적으로 박동하여야 하는 심장과는 달리, 위장관의 연동운동은 음식물의 섭취 정도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 위장관의 페이스메이커에 이상이 생기면 소화불량, 변비, 과민성장증후군 등의 위장관 기능장애가 일어난다.
신장에서 만들어진 소변을 방광으로 전달하는 장기인 요관도 연동운동에 의해서 소변을 이동시킨다. 이 연동운동은 신장의 실질에서 만들어진 소변의 전달통로 시작점인 신배에서 근육성 박동조정기인 페이스메이커에 의해서 조절된다. 요관파동은 신장에서 방광 방향으로 진행되어 소변이 반대로 흐르지 않도록 하고, 연동운동의 횟수는 1분에 3~5회로, 강도와 빈도는 만들어지는 소변의 양에 의해 조절된다. 페이스메이커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연동운동이 요관의 중간에서 끊기게 되면 소변의 흐름이 막혀 수신증이 발생한다. 또한 요로결석이 요관을 막아 흐름의 장애가 생기면 연동운동의 빈도가 심해져서 요관에 경련을 일으킴으로써 옆구리에 격렬한 통증이 발생하게 된다.
이렇듯 신체의 정상기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페이스메이커들이 제 역할을 하여야만 하고, 제대로 된 전달체계와 함께 일하는 장기들이 있어야 한다. 영화에서 김명민처럼 페이스메이커가 제 역할을 벗어나 반란을 일으키거나 각 장기들이 페이스메이커의 신호를 믿고 따르지 않게 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신체와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에도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는 서로에 대해, 이 사회에 대해 페이스메이커일지도 모른다. 페이스메이커의 역할을 존중하고 자긍심을 갖게 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심봉석 이화의대 목동병원 비뇨기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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