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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9월 2일] 내란음모, 지난 세월에 대한 모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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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9월 2일] 내란음모, 지난 세월에 대한 모욕

입력
2013.09.01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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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 지하조직 RO의 회합 내용이 녹취록을 통해 낱낱이 보도된 후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충격과 황당으로 요약된다. 통신∙유류 등 기간시설 파괴 방법을 논의하는 등 전쟁을 준비하자는 내용의 대화를 보고 "바로 우리 옆에 이런 국가 위협 세력이 있었다니"라며 충격을 나타내는 이들이 많다. 동시에 이들의 무게를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시민들도 많다. 항일무장세력을 본받아 인터넷에서 정보를 수집해 총기를 개조하자는 발언을 놓고서는 "정말 이 사람들이 현실 감각이 있는 것인지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1950년대 전후 혼란기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2013년으로 온 듯한 이들의 현실 인식은 종교적 신념에 가깝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소외와 핍박 속에서 자기 신념을 강화하는 사이비 종교와 흡사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희화화의 대상이 되고 유머의 소재가 된다.

어쩐 일인지, RO 조직에 대해 두려움에 휩싸여 적대시하는 반응보다 그들을 희화화할 줄 아는 여유가 안도감을 준다. 우리 사회가 그만큼 성숙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군부독재시절이었다면 또 모를까, 지금이야 경제성장은 물론 정권에 대한 정당성 측면에서도 남과 북이 비교도 되지 않는 시절 아닌가. RO 회합에서 이석기 의원이 "북한에서는 모든 행위가 다 애국"이라거나, 지난해 4∙11 총선에서의 부정선거 사실이 알려져 결국 통합진보당 분당으로 이어진 일을 놓고 "종파분자들이 당권 찬탈을 모의해 통일세력을 도려내고 장기집권 음모를 관철시키려 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기가 막히다 못해 헛웃음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성숙했다고 느끼는 또 한가지 이유가 있다. 광풍처럼 불어닥친 내란음모 사건에도 불구하고 국가정보원에 대한 문제의식이 날아가버리지 않고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진보당은 진보당이고, 국정원은 국정원이라는 지적이다. '하필 이 시점에' 국정원 개원 후 최대 공안사건이 대대적인 압수수색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스스로를 구제하려는 국정원의 '공작'이라고 많은 이들이 생각한다.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비밀등급을 낮춰가면서까지 전격 공개해서 국정원 개혁에 쏠려있던 사회적 관심을 NLL 논란으로 바꿔내더니, 이번엔 국회의원이 낀 희대의 공안사건을 이용해 국정원의 정치 개입 책임을 피해가려 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지금은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을지 몰라도 더 이상 정권 유지에 봉사하지 못하도록 국정원을 개혁하자는 논의는 분명 다시 부상할 것이다.

진보당 지하조직의 존재는 한 지인의 표현대로 우리가 지나온 세월에 대한 모욕이다. 광복 후 우리는 분단과 전쟁, 군사독재와 민주화운동 등을 거치며, 냉전의 희생을 치르고 청산되지 않은 과거에 시달렸다. 이제 우리 국민들이 무엇이 진보이고 무엇이 반민주주의인지 정도는 구별할 줄 안다는 점에서 지난 세월은 헛되지 않았다. 사이비 종교집단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포장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역사적 경험을 무위로 만드는 일이다. 이런 조직 때문에 국정원에게 민주주의의 근본 가치를 훼손하는 역할을 허락한다면 그 또한 모욕일 것이다.

80년대 학생운동 시절을 거친 386세대, 진보적 이념을 지지하는 많은 이들은 "통합진보당을 진보세력과 구분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비난의 화살을 피해가자는 뜻이 아니라 앞으로 풀어야 할 시대의 과제를 포함하는 말이다. 막연히 북한 체제를 동경하는 허튼 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약자를 감싸안는 정책을 확대하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구체적인 움직임을 통해 우리 사회를 살 만한 세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정권의 문제만 비판하면 모두 진보로 치부되던 시절은 끝나고 진보적 가치를 구체적으로 모색해야 하는 시절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지난 세월은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된다.

김희원 사회부 부장대우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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