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뉴욕타임스(NYT)는 이례적으로 경쟁지 워싱턴포스트(WP)의 발행인 캐서린 웨이머스(47)를 소개하는 장문의 기사를 실었다. 기사는 웨이머스를 '매력적이고 흔들림 없는 경영인'이라며 그가 재정난에 처한 신문을 살리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하루 뒤 웨이머스는 미국은 물론 전세계 미디어 업계를 뒤흔드는 발표를 했다. 136년 역사의 WP를 아마존닷컴의 창업자 제프 베조스(49)에게 2억 5,000만달러(약 2,773억원)에 매각한다는 사실을 공개한 것이다. 매각 협상은 극비리에 진행됐고, WP 기자들조차 그 발표에 경악했다.
세가지 조건
8개월여 전인 지난해 말. 도널드 그레이엄(68) WP 회장과 웨이머스 발행인은 워싱턴 시내의 한 식당에 마주앉았다. 두 사람은 80년에 걸친 그레이엄 가문의 WP 경영 역사에서 3대와 4대를 대표하는 인물. 식당에서 웨이머스는 삼촌인 그레이엄에게 WP에 닥친 재정난을 설명하며 세 가지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택할 것을 청했다. 신문의 쇠락을 계속 이어가거나, 신문의 질이 떨어지는 것을 감수하고 감원 등을 통해 비용을 줄이거나, 아니면 팔거나. 올해 초 그레이엄은 투자회사 '앨런&코'에 인수자를 찾아달라며 세 가지 조건을 달았다. WP가 추구해온 저널리즘의 가치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신문을 디지털시대로 이끌 수 있어야 한다, 당장의 수익에 연연하지 않을 만큼 충분한 재산이 있어야 한다 였다.
WP 인수 의사 타진 작업은 은밀히 시작됐고, 지난 3월 베조스도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지난달 8일, 그레이엄에게 베조스의 이메일이 도착했다. WP에 흥미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바로 다음날 그레이엄과 베조스는 만났고, 며칠 뒤 두 사람은 2억5,000만 달러의 가격에도 쉽게 합의했다. 이후 모든 실무 절차 역시 신속히 진행됐다. 매각 사실이 발표되던 날, WP의 몇몇 직원은 눈물을 흘렸다. "지금 체제로도 WP는 살아남을 수 있지만 우리는 생존 이상을 원한다"고 밝힌 그레이엄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누구도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말로 발표를 마쳤다.
"슬프지만 기대"
'워터게이트' 특종 등으로 거의 모든 저널리즘 교과서에 등장하는 WP는 그렇게 한 시대를 접었다. 동시에 종이 신문 시대의 퇴조를 극적으로 부각시켰다. WP 역시, 거의 모든 지구촌 종이 신문들과 마찬가지로 디지털 환경 적응에 실패했다. 1993년 83만부로 정점을 찍었던 WP의 발행부수는 47만부까지 떨어졌고, 전성기 때 1,000명을 웃돌던 직원은 640명으로 줄었다. 경영난으로 주인이 바뀐 신문은 WP뿐이 아니다. 이달 3일에만 해도 NYT의 자회사 보스턴글로브가 미국 프로야구팀 보스턴 레드삭스의 구단주 존 헨리에게 7,000만달러(약 776억원)에 팔렸다. 20년 전 NYT가 보스턴글러브를 매입하면서 치른 11억달러에 견줄 수도 없는 헐값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WP에 주목하는 까닭은 새로운 신문시대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그 기대는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뒤를 이은 디지털 혁신가, 베조스에 대한 기대다. 워터게이트 특종의 주인공인 WP의 밥 우드워드 대기자는 미국 시사주간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거래는 슬픈 일"이라면서도 "언론에는 르네상스가 필요하고 베조스 같은 사람이 투자를 한다면 큰 변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리콘밸리에 거주하는 임정욱 다음커뮤니케이션 본부장도 이메일 인터뷰에서 "전자책플랫폼 '킨들'로 미국 출판계를 선도적으로 디지털화한 것처럼 베조스는 WP를 디지털 시대의 신문으로 변모시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베조스 자신도 WP 사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주인이 바뀌는 것과 상관없이 WP는 변화를 맞고 있다. 지도는 없지만 실험하고 창조해야 한다"고 밝혀 세상의 기대를 뒷받침했다.
"종이 신문 사라질 것"
과연 베조스의 WP는 어떻게 달라질까. 베조스가 아마존에서 쌓은 경험을 WP에 응용할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4,500만명의 소비자가 있다면 우리는 4,500만개의 가게를 운영해야 한다"는 베조스의 말로 대표되는 아마존의 소비자 중심 전략이다. 아마존은 방문 기록과 구매 내역을 분석해 고객 개개인이 좋아할 만한 책과 상품을 추천한다. 아마존의 이 같은 모델을 신문의 웹사이트와 애플리케이션에 적용해 독자 개개인의 관심 분야 뉴스를 집중적으로 편집해 공급하는 서비스를 도입할 가능성이 높다. 또 마케팅 전문가들은 아마존이 보유하고 있는 이용자 구매 기록이 구글의 검색 기록이나 페이스북의 '좋아요' 선택 기록보다 상업적으로 이용 가치가 더 높은 것으로 평가한다. 독자들의 선호를 반영한 타깃형 광고가 가능하고 기사를 보면서 책 등 관련 상품을 아마존에서 구매하게 할 수도 있다. '킨들'을 활용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킨들의 묶음 상품으로 WP를 공급하면서 디지털 유통망을 확대할 것이라는 전망. 책보다는 분량이 적고 일반 기사보다는 내용이 풍부한 콘텐츠를 건?2달러 미만에 판매하는 '킨들 싱글' 서비스가 WP의 새로운 유료화 모델이 될 가능성 또한 점쳐진다.
물론 우려의 시각도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신문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예기치 못한 뉴스를 읽게 하는 것"이라며 "지나친 독자 맞춤형 전략은 독자를 가두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흥미 위주로 뉴스를 소비하면 재미는 없지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딱딱한 뉴스를 멀리하게 되고, 결국 저널리즘의 기본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베조스는 지난해 11월 독일 일간 베를리너자이퉁과의 인터뷰에서 "확실한 것은 20년 내에 종이 신문이 사라지게 되리라는 것"이라며 "호텔 같은 곳에서 손님들에게 부가 서비스로 인쇄된 신문을 제공할 수는 있겠지만 종이 신문은 일반적이지는 않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더 이상 종이로 신문을 보지 않는다고 밝힌 그는 "곧 모든 가정이 하나 이상의 태블릿을 갖게 될 테고 이런 흐름은 신문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WP가 종이 신문 인쇄를 중단할 수도 있다는 예측도 있다. 김성해 대구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도 "태블릿으로 뉴스를 보는 게 이제 불편하지 않다"며 "자연스럽게 종이신문을 대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김위근 한국언론재단 선임연구위원은 "종이 신문의 브랜드 가치가 디지털로 그대로 옮겨가기는 쉽지 않다. 당장 WP가 종이 신문 발행을 중단한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두고 보자"
베조스가 가져올 WP의 변화를 장기적으로 지켜봐야 한다는 시각도 많다. 베조스가 WP를 전액 개인자산으로 산 것이 그런 분석을 뒷받침한다. 단기적 손익에 민감한 주식시장과 투자자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갑부라는 점도 당장 수익을 내기 어려운 장기적 혁신에 대한 기대를 높이는 요인이다. 미국 11위 갑부인 베조스의 재산은 252억달러(약 28조 1,100억원)로 그가 WP에 투자한 2억 5,000만달러는 재산의 1%에 불과하다.
이런 기대 섞인 전망에 냉소하는 이들도, 소수지만 있다. 투자분석가 크레이그 후버는 NYT에 "신문 산업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며 "WP가 베조스에게 신문을 판 것은 그가 손실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미국 주간지 뉴요커는 "베조스가 WP를 인수한 것은 아마존을 세금 논란 등에서 보호하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며 "WP가 아마존을 옹호하는 기사를 대놓고 쓰지는 않겠지만 베조스는 언론 사주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좀 더 분명히 낼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류호성기자 r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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