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7월 15일이었으니 중국의 귀신날(鬼節)이다. 이름은 다르지만 날짜와 풍습이 우리의 백중과 같다. 이날, 가족이 모여 조상의 묘를 찾아간다. 란저우(蘭州)에서 출발한 차는 내내 그런 가족들을 스쳐갔다. 차창 밖 풍경은 바람이 모래를 들어일구는 펑퍼짐한 황무지였다. 음택풍수 따윈 애초 불가능했는지 지평선에 산개한 황토 무덤들의 좌향이 난했다. 창밖 멀리 웅장한 치롄(祁連)산맥의 능선이 나란히 달리고 있었는데, 시선은 무덤가에 차일을 치고 쭈그린 사람들의 거칫한 얼굴 쪽으로 갔다. 목적지 탓이었을 것이다. 둔황(敦煌). 천년의 시간 저쪽에 깊이 잠든 카라반의 도시로 나는 가고 있었다.
대륙이 아직 황제의 연호를 쓰던 마지막 시기 숨겨져 있던 장경동(藏經洞)이 열리지 않았다면, 둔황은 실크로드 미술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나 들어봤을 지명이었을 것이다. 그 장경동의 먼지 쓴 두루마리 뭉치 속에 신라 스님 혜초의 이 들어 있지 않았다면, 역시 둔황은 서역 문명사에까지 관심을 가질 법한 교양인이나 아는 곳이었을 테다. 그러나 모두가 배워서 안다. 8세기 법화(法華)의 세계를 찾아 떠난 혜초의 발걸음은 그럴 만큼 웅혼했다. 그건 미증유의 종교적 발심(發心)이었겠지만, 전인미답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자의 로망이지도 않았을까. 그 얘긴 뒤에 하자.
한국에서 둔황을 찾아가는 편한 길은 간쑤성(甘肅省) 란저우까지 바로 비행기로 날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편하다'는 대륙적 스케일로 알아들어야 한다. 간쑤성 성도인 란저우에서 성의 서쪽 끝인 둔황까지 대략 1,200㎞, 삼천리다. 중간중간 쉬어 가면 차로 이틀. 둔황에도 자그만 공항이 있다. 하지만 그 국내선 비행기 좌석은 출발 두어 달 전에 매진된다고 했다. 그리고 기차도 있다. 공식적으로 열다섯 시간 걸린다. 실제로는 물론 그때그때 다르다. 그러니 마음을 느긋이, 그리고 단단히 먹어야 한다. 중국 여행은 원래 그렇게 하는 것이다.
란저우는 1,400년 역사의 고도다. 오래된 중국의 도시가 대개 그렇듯 란저우도 오래된 티가 거의 안 난다. 도시는 급하게 팽창하고 있었다. 타워 크레인의 실루엣이 란저우의 스카이라인을 이루고, 그 삐죽한 철골의 그림자가 황허(黃河)에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번쩍이는 정면보다 도시의 뒤통수를 보고 다녔다. 란저우 시내엔 유독 '칭쯔(淸眞)'라는 두 글자를 앞에 단 간판이 많다. '이슬람'을 뜻하는 중국어 어휘다. 중국 지도를 펴 놓고 보면 란저우는 대륙의 거의 한복판이다. 하지만 청조(淸朝) 이전엔 서쪽 변방이었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대륙 서쪽으로의 여행은, 말하자면 중화(中華)의 자장을 벗어난 땅으로의 여행인 셈.
출출해 식당에 들어갔다. 이곳의 쇠고기면(란저우 라?x)이 유명하대서 전부터 먹어보고 싶었다. '류뤄?x(牛肉麵)'이라고 써 놓은 곳이면 어디나 판다. 일부러 '칭쯔'가 붙은 집으로 갔다. "이건 할랄(halalㆍ이슬람 율법에 따라 도축한 고기)인가요?" 영어로 물어봤다. 수줍은 표정의 점원은 알아듣지 못했다. "…란저우 라?x." 그의 대답이었다. 점원이 그릇을 놓고 가는데, 가까이서 보니 그의 눈빛이 특이했다. 녹색이 도는 짙은 잿빛. 얼굴 윤곽은 한족과 다름없었다. 잡종 유전에서 홍체의 색이 가장 늦게 변한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그의 조상은 어느 먼 서역에서 온 것일까. 느끼해 보이는 모습과 달리 라?x 맛은 매우 부드러웠다.
란저우에서 둔황까지 자동차로 하루에 가긴 힘들다. 그래서 흔히 하룻밤 묵는 곳이 장예(張掖)다. 이유는 이곳에서 단샤(丹霞)지형을 볼 수 있기 때문. 단샤는 '붉은 노을'이라는 뜻이다. 왜 그런 이름인지는 가보면 안다. 수만 년 풍화와 퇴적을 반복한 이곳의 사암은 다양한 금속 성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 그래서 층층이 다른 빛깔을 띤다. 그 퇴적암 지대가 다시 융기와 단층화를 반복해 지상에 너울져 드러난 게 단샤다. 이 천상의 빛의 향연이 어떻게 억겁의 세월 흙 속에 묻혀 있었던 것일까. 한국인 관광객들이 이곳에 붙인 이름이 칠채산(七彩山)이다.
강수량이 증발량의 수십 분의 1도 안 되는 메마른 땅인데 하필이면 찾아간 날 하늘이 끄무레했다. 지하에서 태어난 빛너울이 하늘에 광채를 뿌리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일행 중 어느 선배가 내게 툭 말했다. "차라리 잘 된 거야." "왜요?" "여기에다 빛까지 있었다고 해봐. 그 사진을 어떻게 (신문에) 쓰겠니? 뽀샵질 한 거라 생각하고 아무도 믿지 않겠지."
둔황이 가까워졌다. 황무지이던 창 밖 풍경이 점차 사막으로 변해갔다. "어제 비가 내려서 어쩌면 신기루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현지인 가이드는 말수가 적었다. 이 길의 끝에, 그리고 치롄 산맥 너머에 있는 신장(新疆)과 티베트에 대해 자꾸 물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가 신기루라는 말 끝에 혼잣말처럼 얘기를 흘렸다. "저기 신기루처럼 보이는 저 호수를 넘으면 동티베트에요. 纓?1950년 중국의 병탄 이후 일어난 일련의 봉기) 때 저 호숫가에 잡아온 티베트인들을 교화시키는 곳이 있었어요. 4, 5년씩 가둬놓고 얼마나 고생을 시켰는지…" 우람하던 치롄 산맥의 능선이 낮아져 평토가 돼갔다. 본격적인 실크로드가 시작됐다는 뜻이었다.
둔황은 예상했던 것보다 상업화된 도시였다. 호텔도 많고 식당도 많고 유명한 밍싸산(鳴沙山)과 위에야첸(月牙泉)도 관광객으로 북적댔다. 생각해보니 그게 어울리는 모습이다. 2,000년 전부터 둔황은 죽음을 무릅쓰고 사막을 건너온 보랏빛 수염과 초록 눈동자 상인들의 도시가 아니었던가. 그들의 왁자한 모습에, 혜초도 그들의 길을 되짚어 사막을 건널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동서원융(東西圓融), 화이잡거(華夷雜居)의 오아시스. 이런 곳이라면 구도의 열정이 여행의 로망과 겹쳐져도 괜찮을 것이다. 전세계에서 몰려든 여행자들로 둔황의 밤은 여전히 흥성했다.
마지막 일정으로 막고굴(莫高窟)을 찾아갔다. 지상 최대의 갤러리이자 최고의 정신 유물이 발굴된 보물창고. 막고굴은 중국의 다른 관광지와 달리 경비가 자못 삼엄했다. 이곳의 아픈 역사 때문일 것이다. 막고굴에서 장경동이 발견된 것은 1900년. 도교 사제라지만 실은 건달과 다름 없었던 왕위안루라는 남자가 우연히 뒷날 17호굴로 번호가 붙은 장경동을 찾아냈다. 가로 세로 약 3m씩 되는 작은 굴이었다. 그곳에 5만권에 이르는 고서가 보관돼 있었다. 하지만 청나라는 나날이 쇠락해가고 있었다. 조정은 먼 변방의 먼지 쌓인 책을 들춰볼 여력이 없었고, 얼치기 도사에겐 돈을 싸 들고 찾아오는 외국의 탐험가가 줄을 이었다. 현재 값어치 있는 장경동의 고서는 모두 다른 나라에 있다.
"조선반도 학자들은 이 벽화의 조선반도 사람들을 왕자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왕입니다. 문수보살 아래, 토번(티베트) 왕 뒤에 그려진 것은 당시 각국의 왕들입니다."
둔황연구소 리신(46) 연구원은 한국말을 꽤 유창하게 했다. 그가 335호굴 안에서 가리킨 손끝에 고구려와 백제의 왕이 있었다. 고구려 왕은 깃털관을 쓰고 덩치가 컸고 백제 왕은 왕관을 쓰지 않았다. 전체 735개의 굴 가운데 약 60곳에 불상과 벽화가 남아 있고, 관광객은 대개 하루에 8곳 정도를 관람할 수 있다. 고맙게도, 15곳을 보는 특혜를 받았다. 1,500년 전 비천상의 날렵한 몸짓이 여전히 아찔했다.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잘려나간 보살의 손목엔 천년 전 진흙과 함께 빚어 넣었을 지푸라기가 남아 있었다. 리 연구원은 한반도와 관련된 굴을 빠뜨리지 않고 보여줬다.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삼한 사람들의 얼굴이, 피부색조차 퇴색되지 않은 채 오롯이 남아 있었다.
30분쯤 지났을까. 시계를 보니 두 시간이 이미 훌쩍 흘렀다. 둔황의 석굴 속을 보는 경험은 시간을 벗어난 행위인 듯했다. 어쩌면 옛날 한 무제가 흉노를 몰아내고 이곳에 도시를 세웠을 때부터, 둔황의 여러 시간들은 제각각 현재로서 여기 남아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내 첫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둔황으로의 여행은 무덤 따위를 떠올릴 일이 아니었다. 둔황은 여전히 살아서 숨쉬고 있었다. 천년의 깊이로 숨쉬고 있었다.
[여행수첩]
●하나투어가 실크로드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상품을 판매 중이다. 란저우에서 시작하는 4박 5일 코스(99만9,000원부터), 우루무치에서 시작하는 8박9일 코스(129만9,000원부터)가 있다. 각각 동방항공과 대한항공의 전세기를 이용하며 출발일 기준 10월 7일까지 각각 주2회 운항한다. 1577-1233. ●시차는 한국보다 1시간 늦지만 중국 대륙의 서쪽에 위치해 일출과 일몰 시간은 2시간 이상 한국보다 늦다. 혹독한 대륙성 기후라 여름과 겨울에는 여행하기 힘들다. 전기 콘센트의 형태가 다르지만 대부분 숙소에서 한국 전자제품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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