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만큼 심각하던 것들이 깃털처럼 가벼워질 수 있는 곳. 오스트리아 티롤(Tirol)도 그런 곳 가운데 하나다. 달처럼 중력이 6분의 1로 줄진 않는다. 하지만 이곳에 오면 번민의 무게가 6분의 1로 감소되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된다. 알프스의 눈부신 바람 그리고 맑은 햇살의 입자들이, 상쾌하게 부딪치며 당신 이마 위에서 딱따글거릴테니까.
덧붙여, 요즘 잘 나가는 어떤 영화에 대한 소소한 스포일러 하나. 질주하던 컴컴한 열차가 멈춰서고 소녀가 지구의 희망을 발견하는 곳, 멸종된 줄 알았던 북극곰이 모습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설산의 능선, 그 장면이 촬영된 장소가 바로 여기 티롤이다.
“명예? 그게 뭐가 중요한데요? 내가 사는 곳이 이렇게 아름답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여기에 있는데.”
티롤에 도착한 첫날, 유럽의 스키어들이 오매불망 가보고 싶어한다는 찔러탈(Zillertal) 계곡으로 갔다. 그곳 마이어호펜(Mayrhofen)이라는 마을의 삼백 년 묵은 고색창연한 호텔 계단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데 유쾌한 표정의 노신사가 다가왔다. “나도 커피 한잔.” 계단에 나란히 앉은 그는 산악인 피터 하벨레(71). 나이보다 열다섯 살은 젊어 보였다. 1978년 이탈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와 함께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산을 무산소로 오르는 데 성공한 남자다.
에베레스트산에서 내려온 후, 메스너는 불가능의 영역을 차례로 정복하며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알피니스트가 됐다. 하벨레는 고향으로 돌아와 청소년들에게 스키와 등산을 가르치며 사는 생활을 택했다. 경쟁과 등수가 일상인 공화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게 누가 ‘위너’를 물었다면 답은 메스너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젠 뭐라고 답해야 할까. 알프스 준령 새털구름을 배경으로 바퀴가 빨간 증기기관차가 느긋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하벨레가 친근해진 말투로 얘기했다.
“가장 아름다운 등산은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거라네, 친구.”
알프스 하면 쉽게 스위스를 떠올리지만 사실 알프스 산맥의 절반 이상은 오스트리아 영토다. 퍼오아를베르크, 티롤, 잘츠부르크, 케른텐 주(州)가 산맥의 주름을 따라 경계를 맞대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넓고, 또 가장 아름다운 주가 티롤. 동화 같은 마을 위로 소들이 풀을 뜯고, 그 위론 빽빽한 침엽수림이 펼쳐지다 만년설이 남은 봉우리가 석양을 받아 빛나고… 말로 하자면 늘 이렇듯 진부하다. 그래, 이렇게 표현하자. 전후좌우, 사방 어디든 일백 보만 전진하면, 당신은 알프스의 파노라마에 포위당하게 된다!
티롤의 주도 인스부르크(Innsbruck)를 소개하는 책자에 빠지지 않는 문구는 ‘알프스의 수도’다. 동계올림픽을 두 번(1964, 1976년)이나 개최한 도시니 스스로 그렇게 불러도 과하지 않을 듯하다. 그래서 레포츠의 중심지로만 알려져 있는데, 이 산악도시에도 웅장하고 절절한 역사가 있다.
중부 유럽에 대해 이해하려면 우선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해 알아야 한다. 맞다. 세계사가 수능시험에 필수로 포함됐던 시절 외웠던 그 가문이다. 딱 한 줄로 요약해보자. 스위스 알프스 산골의 빈한한 백작 가문에서 출발해 13세기부터 600년이나 중부 유럽을 통째로 ‘해먹었던’ 집안. 그 집안의 세력은 광대했으나 늘 알프스의 산골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곳 인스부르크에 아름다운 궁전과 세련된 거리를 남겼다. IC칩이 내장된 29유로짜리 ‘인스부르크 카드’ 한 장이면, 24시간 동안 무제한 중세 거리의 흔적을 탐방할 수 있다.
시 중심가,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곳으로 가면 번쩍번쩍한 지붕의 발코니를 만나게 된다. 본래 영주의 공관 건물이었는데, 막시밀리언 1세 황제가 탐이 났는지 1500년 2,738개의 동판자로 지붕을 덮어 자신의 발코니를 만들었다. 여기부터 성 안나 기념탑까지 죽 이어진 마리아 테레지아 거리가 알프스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거리다. 진짜 그런지는 알프스를 다 돌아다녀보기 전엔 모를 일. 어쨌든 거리의 악사가 연주하는 모차르트만큼은, 숙소로 가는 마지막 전차를 미련 없이 무시했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외곽에_아마도 일본인과 한국인 관광객들 사이에서 유별나게_그 유명한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 월드가 있다. 보석으로 된 미술관이다. 과연_일본인과 한국인들의 호들갑만큼인지는 모르겠으나_아름다웠다. 그랬지만, 거기 가는 길에 버스를 잘못 타 들른 조그만 마을 할(Hall)이 내겐 더 인상적이었다. 자갈로 포석을 깐 미로 같은 길이 이어지는 중세 마을. 그런데 젠장, 또 비가 왔다. 오백 년은 된 듯한 지붕 처마 밑에 쭈그리고 비가 멎길 기다렸다. 불쌍해 보였나 보다. 내 또래의 남자가 창을 열고 따뜻한 차를 건넸다. 한스 슈필트너라는 그 친구 왈. “움츠리지 마. 숨을 깊게 쉬어. 네가 들이키고 있는 건, 알프스의 심장이 뱉어내고 있는 공기라구.”
인스부르크(오스트리아)=글ㆍ사진
[여행수첩]
●빈과 잘츠부르크, 스위스 취리히, 독일 뮌헨,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열차로 쉽게 갈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 빈 등 중부유럽 주요 공항에서 인스부르크로 가는 항공편이 있다. ●주요 관광지 입장과 케이블카 무료왕복, 대중교통 무제한 이용 등이 가능한 인스부르크 카드를 판매한다. 24, 48, 72시간권 각 29, 34, 39유로. ●겨울 스포츠뿐 아니라 4계절 레포츠 인프라가 훌륭하다. 인스부르크 투리스무스(www.innsbruck.info)에서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다. (+43)512-59850. ●황금 지붕이 있는 중심가에 한식당 켄지(Kenzi)가 있다. 중부 유럽 여행에서 한식이 간절했다면 좋은 선택. 기자 출신 동포가 운영한다. (+43)512-560813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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