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 최태원(53) 회장은 횡령을 주도한 것인가, 단지 권고를 받고 부탁을 들어준 것뿐인가. 수백억원대 횡령 혐의로 1심에서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 받은 최 회장의 '범행 동기'를 놓고 항소심 재판부가 검찰에 공소장 변경을 권고했다. 최 회장의 범행 동기를 소극적으로 변경하라는 요구인데, 검찰은 "형량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며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서울고법 형사4부(부장 문용선)는 27일 공판에서 "검찰이 제기한 공소사실 중 최 회장은 범행의 동기와 이유에 대해 부인하며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며 "범행 동기 부분의 공소 사실을 변경해 28일까지 제출해달라"고 요청했다. 재판부는 이어 "보다 투명하고 확실한 절차를 밟아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하고, (검찰과 최 회장 형제 등이) 승복할 수 있는 판결을 내리기 위한 것으로 재판 결과와는 무관할 것"이라고 부연 설명했다.
재판부는 일단 최 회장이 선물투자를 위해 2008년 그룹 계열사인 SK C&C주식을 담보로 저축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았던 부분을 일부 변경할 것을 권고했다. 최 회장은 이날 공판에서 "선친이 작고한 뒤 동생(최재원)이 상속 지분을 포기해 마음의 빚이 있었다"며 "김원홍(전 SK해운 고문)에게 돈을 보내 수익이 나면 동생에게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는 '김원홍을 통해 옵션투자를 해 단기간에 유동성 부족을 해소하고 투자수익을 얻기로 마음 먹고'라고 기술한 검찰의 공소사실에 적힌 기존 범행 동기와 차이를 보인다.
재판부는 이 동기에 주목했다. 재판부는 검찰의 주장과 달리 최 회장의 동생인 최재원(50) SK그룹 수석부회장과 김원홍(52) 전 SK해운 고문이 주도한 대출을 최 회장은 승인을 한 것일 뿐 개인 투자금 마련 목적으로 이들에게 지시한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사실상 최 회장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SK C&C는 최 회장 형제의 개인 회사 격이어서 담보 대출 자체가 범죄는 아니지만, 이로 인한 자금 부족은 회삿돈을 횡령해 창업투자사인 베넥스인베스트먼트에 출자한 횡령 범죄의 주요 동기가 된다.
재판부는 추가로 최 회장이 베넥스인베스트먼트에 출자금 명목으로 회사 자금을 투자한 것 역시 최 부회장과 김준홍 베넥스인베스트먼트 대표, 김 전 고문의 공모를 묵인 혹은 승낙한 것으로 변경할 것을 요청했다.
검찰은 "공소장 변경의 타당성 여부를 다각도로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검찰 내부에서는 최 부회장과 김 전 고문의 동기가 좀 더 부각되는 것에는 우려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한편 재판부는 이날 최 회장 측에서 신청한 김 전 고문에 대한 증인신문 신청을 기각했다. 김 전 고문은 현재 대만에서 체포돼 국내 송환을 앞두고 있다. 재판부는 "이미 충실히 사실관계 등을 살펴봤기 때문에 김씨가 설사 내일 온다 해도 조사할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최 회장 형제에 대한 선고 공판은 예정대로 다음달 13일 열린다.
남상욱기자 thot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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