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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들은 선거법을 위반했나

입력
2013.08.27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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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님의 시 ‘님의 침묵’이나 이육사님의 ‘청포도’에서 님은 빼앗긴 조국일 수도, 연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문학을 배울 때 문장에 다의성을 담는 것처럼, ‘그가 진보적인 대통령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약자의 신음에 더 잘 귀 기울일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라는 문장에서 ‘그’란 야당 대선 후보 일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27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417호 형사대법정 증언대에 앉은 시인 문동만(45)씨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피고인석에는 문 시인의 친구인 소설가 손홍규(39)씨가 앉아 있었다. 손씨는 지난해 12월 대선 5일 전 문인 137명이 ‘우리는 정권교체를 원합니다’라는 제목의 시국선언을 일간지에 광고로 게재한 것과 관련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손씨는 당시 문인들을 대표해 광고대금을 입금했다가 문인 중 유일하게 기소된 뒤 국민참여재판을 요청했으나, 배심원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부장 이범균)는 “시국선언은 특정 후보를 지칭한 것으로 볼 수 있고 손씨가 의도적으로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고 볼 수 있다는 배심원들의 만장일치 의견을 존중한다”며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다. 공직선거법 93조는 선거일 180일 전부터 선거에 영향을 미칠 의도로 특정 정당 또는 후보에 대한 찬반 광고 등을 게재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손씨의 변호를 지원했던 한국작가회의 측은 “참여재판이 국민의 일반적 법 감정을 나타내는 만큼 판단을 존중한다”면서도 “항소 여부는 추후 논의해 결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손씨는 이날 재판에서 “선거를 앞두고 젊은 작가들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며 사실상 선거에 영향을 미칠 의도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다음 쟁점은 광고가 ‘특정 정당 또는 후보에 대한 찬반’을 담은 것이냐 여부였다. 이에 대해 문인들은 “원하는 대통령 상을 제시했을 뿐 특정 후보를 지지한 것이 아니다”고 무죄를 주장했다.

문씨는 “‘정권교대가 아닌 정권교체’라는 문구는 야당 후보를 지지하는 것 아니냐”는 검사 등의 질문에 “137명 모두 광고 문구에만 합의했을 뿐 각자 생각이 다르다”며 “(시국선언에 담긴) 제주해군기지, 비정규직 문제 등은 참여정부 등 이전 정부에도 해당 되기에 반드시 야당 후보만 지칭한다고 볼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검찰 측은 “특정 정당이나 후보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이 없더라도 (시국선언 내용을) 일반인의 사회적 통념에 기초해 판단해야 한다”며 배심원들에게 유죄 평결을 요청했다. 검찰은 이어 “여론조사 공표조차 금지된 시기에 광고를 게재하고 관련 인터뷰에 적극 나섰던 손씨는 작가라 하더라도 법적인 책임을 피할 수 없다”며 벌금 300만원을 구형했다.

이날 재판은 30여명의 문인들이 참관했다. 소설가 유채림(51)씨는 “작가의 양심상 이정도 표현 수위라면 한국사회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했다”며 “이렇게 법정에서 논한다는 것 자체가 떨떠름하다”고 말했다.

조원일기자 callme1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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