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 폰을 검색해보니 국정원의 대선개입으로 거리가 시끄러운 우리처럼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도 전직 CIA 직원 스노든 사건으로 감시사회에 관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스노든은 미국 국가안보국이 2007년부터 비밀리에 운영해온 프리즘이라는 안보 전자감시 프로그램을 통해 개인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수입해 왔다는 사실을 폭로하였다. 이 폭로를 계기로 국가 안보를 위해서는 개인 정보 사찰이 불가피하다는 주장과 개인의 권리가 심각하게 훼손당했다는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러한 논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모르지만 '안보'를 위해선 어느 정도의 '감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점점 더 힘을 얻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정보기관에 의한 무차별 개인정보 수집행위의 '사실'보다는 그 '방법'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옛날 같으면 시민들이 거리로 뛰어나와 거세게 저항할 법도 한데 스노든 사건에 대한 시민사회의 반응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 표면에 드러난 것뿐이라는 듯 미적지근하다. 적대국가에 관한 스파이 활동처럼 내부에 있는 테러세력을 찾아내기 위한 정보 수집을 용인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태도마저 감지된다. 마치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처럼.
현대 감시사회의 핵심문제는 오히려 정보수집의 '방법'에 있다. 구글, 페이스북, 애플, 스카이프, 마이크로소프트, 야후, 유튜브 등 인터넷 서비스 기업 대부분이 프리즘 프로그램에 협력했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처럼 현대 정보사회를 움직이는 디지털 네트워크 자체가 시민사회를 감시하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 우리가 생활 정보를 얻기 위해 구글링을 하면 할수록, 우리의 정보는 그만큼 더 노출되고 수집되고 감시된다. 우리가 디지털 정보 네트워크에 의존하면 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디지털 감시의 그물망에 걸려들게 된다.
현대사회는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디지털 원형감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벤담의 원형감옥 팬옵티콘(panopticon)은 현대사회의 상징기호이다. 감시자가 있는 중앙 탑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배치된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은 감시자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지만 늘 감시당하고 있다는 불안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가 감시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우리를 대체로 사회가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하게 만든다. 정보기관이 이러한 불안의식을 끊임없이 심어줬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디지털 정보사회는 이러한 불안마저 제거하여 사람들 스스로 체제에 순응하게 만들려고 한다. 누가 구글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면서 감시당한다고 느끼겠는가? 페이스북에 국가 안보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자신의 소소한 일상생활 이야기를 올리면서 감시사회와 권리침해를 떠올리겠는가? 정보기관이 우리에게 구금과 고문의 위협을 가하지 않아도 우리는 스스로 정보를 내놓는다.
이렇게 우리 사회가 정보사회로 발전할수록 우리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원형감옥의 중앙 탑은 사라진다.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폐쇄회로(CC)TV는 고전적 원형감옥의 잔재일 뿐이다. 현대사회가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것은 공포와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기쁨과 쾌락의 대상이다. 그것은 바로 스마트 폰이다. 스마트 폰을 자신의 일부처럼 사용하는 젊은 세대는 결코 개인권리 또는 정보 보호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은 무한한 인터넷 정보를 소비할 수 있다면 개인정보의 희생마저 개의치 않는다.
디지털 감시사회는 이처럼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정보를 얻고, 개인의 행동을 통제한다. 왜 이게 문제되는 것일까? 언뜻 사소해 보이는 정보들이 어마어마하게 모이면 우리의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어떤 교통수단을 주로 이용하고, 어떤 책들을 즐겨 읽고, 어느 곳에 자주 가는지에 관한 빅데이터를 분석하면 그 사람의 성향과 미래 행위의 방향을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들킨다는 것은 우리의 자유가 박탈당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우리에게 자유처럼 여겨지는 인터넷 공간이 과연 진정한 자유공간일까 의심이 드는데 때마침 메시지 알림 음이 울린다. 내 생각을 벌써 읽어낸 것일까?
이진우 포스텍 석좌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