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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8월 26일] 누가 권은희를 영웅으로 만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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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8월 26일] 누가 권은희를 영웅으로 만드는가

입력
2013.08.25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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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정 사회부 부장대우 jaylee@hk.co.kr

그녀는 당당했다. 여당 의원들의 윽박지르기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감정을 자극해 실언을 유도하려는 듯한 질의에도 말려들지 않았다. 시종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이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을 또박또박한 전하는 그녀의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지난 19일 국회에서 열린 국가정보원 댓글 의혹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한 권은희 서울 송파경찰서 수사과장. 그가, 시쳇말로, 떴다.

‘청문회 스타’란 수식어를 달아 각계의 응원 메시지를 전하는 기사들이 쏟아졌고, 그의 소신 발언에 감동한 고교생들이 경찰서를 찾아 감사패를 전했다. 인터넷에서는 그를 응원하는 뜻에서 장미꽃 한 송이씩을 보내자는 캠페인이 벌어지는가 하면, 한 보수 언론의 인터넷판은 경찰 내부에서도 응원이 줄을 잇는다는 통신사 기사를 인용 보도했다가 자사 출신 보수 논객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국정원의 댓글 공작과 경찰 수뇌부의 수사 축소ㆍ은폐를 ‘선거개입’ 행위로 판단한 검찰 수사 결과에 줄곧 딴지를 걸어 온 이 신문까지 남의 기사를 베껴가며 이른바 ‘제목 장사’를 노린 것을 보면, 권 과장의 높은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물론 비판 여론도 없지 않다. 권 과장의 국회 발언 가운데는 이 신문의 지적처럼 “객관적 사실이라기보다 자신의 의견과 주장이 밝힌 대목”이 적지 않다. 상당수 국민의 뜨거운 지지에도 불구하고, 법정에서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가려지기도 전에 정치권의 일부까지 나서 그를 ‘민주주의를 지켜낸 영웅’으로 추켜세우는 것은 섣불러 보인다.

당장은 정치적 지향 혹은 계산에 따라 편이 갈릴 수밖에 없는 그에 대한 평가에 앞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누가, 무엇이 그를 영웅으로 보이게끔 만드느냐가 아닐까 싶다.

청문회에서 권 과장을 한껏 돋보이게 한 A급 조연은 단연 새누리당 의원들이다. 이들은 “광주의 경찰이냐, 대한민국의 경찰이냐”(조명철 의원),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기를 바라지 않았느냐”(김태흠 의원) 등의 저급한 발언으로 애당초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 규명에는 관심도 의지도 없었음을 드러냈다. 댓글 공작이 밝혀진 마당에도 뻔뻔하게 ‘여직원 감금’ 주장으로 물타기를 시도한 국정원 관계자들의 활약도 한몫 했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지면 민주당의 무능함이 더 큰 문제였다. 검찰의 전방위 수사로도 잡아내지 못한 엄청난 사실이, 더구나 국정조사특위 구성과 증인 채택에 여러 날을 허송하고 간신히 열린 청문회에서 일거에 밝혀지리라 기대한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다만 ‘대북심리전’이라는 법적 근거가 미약한 논리를 앞세운 국정원의 공작이 왜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 범죄인지를 조목조목 짚어냈어야 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전략 부재와 어설픈 대응으로 여야를 싸잡은 비판이나 ‘국정조사 무용론’을 자초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권 과장에 쏠린 국민적 관심의 무게가 줄어드는 건 아니다. 누군가는 그의 당당함을 높이 사면서도 “소신이 곧 진실은 아니다”고 지적했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상명하복 문화에 철저히 지배돼 온 공무원 조직에서 불이익을 무릅쓰고 자신의 소신을 지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설사 법정에서 “수사 축소ㆍ은폐 시도는 절대 없었다”는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더라도, 수사 과정 내내, 그리고 전 국민이 TV로 지켜보는 청문회장에서 여당 의원들의 집단 맹공에 맞서 소신과 원칙을 당당하게 밝혔던 권 과장의 용기는 그 자체로 값진 일로 남을 것이다.

권 과장은 30일 김 전 청장의 공판에 증언으로 출석한다. 또다시 극명하게 편이 갈린 과한 칭송과 공격에 휩싸일 그의 처지가 안쓰럽다. 그를 영웅으로 떠받들기 전에 내 주변부터 살피고 고민해 보자.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든, 마땅히 해야 한다고 믿는 일들을,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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