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에 살았던 일본인이라고 모두 죄가 있는 건 아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ㆍ72)의 한마디는 언뜻 공허하게 들린다. 일본 개봉에 이어 다음달 5일 국내 개봉하는 신작 ‘바람이 분다’의 모호한 역사관에 대한 변명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스튜디오 지브리가 25년 전 내놓았던 ‘반딧불의 묘’의 연장선상인가. ‘바람이 분다’는 태생적으로 논란을 피해 가기 힘든 영화다.
지난달 말 일본 도쿄에서 한국 기자들과 만난 미야자키 감독은 초조해 보였다. 그는 “민감한 질문이 많이 나올 것이라고 각오하고 나왔다”고 했다. 영화를 바라보는 한일 양국의 시각이 다르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의 주요 소재인 제로센(零戰)은 태평양전쟁 때 활약한 일본 해군의 주력 전투기이며 ‘가미카제 특공대’의 자살 공격에 사용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제로센을 설계한 호리코시 지로를 어떻게 볼 것인지는 그리 간단치 않다. 단지 비행기라는 꿈을 좇았던 사람이라는 설명으론 부족하다. 제로센은 태평양전쟁에서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고, 제조사 미쓰비시중공업은 조선인 10만명을 강제 동원해 노동력을 착취했다.
미야자키 감독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하다. 그는 연민을 갖고 호리코시를 바라본다. “제로센은 구식 전투기여서 가미카제 특공대에서 별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다. 호리코시는 그 시대와 함께 살 수밖에 없었어요. 전쟁이 끝나고도 같은 회사에 있었기 때문에 옳다, 그르다 말할 순 없었을 것입니다. 열심히 살아갔기에 비참했던 것이죠.”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시구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에서 제목을 가져 온 ‘바람이 분다’는 ‘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으로 유명한 미야자키 감독이 ‘벼랑 위의 포뇨’ 이후 5년 만에 내놓은 작품이다. 일본에선 7월 개봉해 5주 연속 흥행 1위를 지키며 600만명에 이르는 관객을 동원했다.
영화 속 호리코시 지로(堀越二郞)는 동명의 실존 인물과 동시대 소설가 호리 다츠오(堀辰雄)의 삶을 뒤섞은 가상의 인물이다. 비행기를 만들기 위해 인생을 바친 것은 호리코시 지로의 삶을 따라 가지만,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부잣집 딸과의 순애보는 호리 다츠오의 자전적 소설 에서 가져왔다. 실존 인물을 다루기 때문에 작품은 감독의 전작과 달리 현실 세계에 발을 디디고 있다. 호리코시 지로가 꿈 속에서 비행기 설계자 카프로니 백작을 만나는 장면을 제외하면 판타지의 요소는 전무하다. 풍경 묘사는 변함 없이 아름답지만, 지브리 특유의 유머는 거의 없다.
미야자키 감독은 주인공에 자신과 아버지를 투영시켰다. 미야자키 감독의 아버지는 태평양전쟁 동안 비행기를 만드는 공장을 운영했고, 감독은 스스로 밝혔듯 어렸을 때부터 밀리터리 마니아였다. 미야자키 감독은 최근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게 회색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시대를 아버지는 ‘좋은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그 때도 푸른 하늘은 푸른 하늘이었을 텐데 그걸 깨달을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바람이 분다’는 호리코시 지로의 꿈을 중립 지대로 옮겨 놓는다. 호리코시 지로는 비행기를 만들고 싶었을 뿐이고, 비행기라는 게 원래 파괴와 살생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제로센이 추락하고 일장기가 우수수 떨어지는 모습이 일본 군국주의의 몰락을 암시하긴 하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살육의 도구를 만들어야 하는 주인공의 고뇌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기술자는 중립적”이라는 감독의 소신이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다.
‘바람이 분다’에 드러난 미야자키 감독의 모호한 역사 의식은 일본 내에서도 논쟁의 대상이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소재로 한 영화 ‘케이티’의 시나리오 작가인 아라이 하루히코는 “미야자키 감독이 영화 밖에서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이 한국과 중국에 사과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침략전쟁에 쓰인 전투기 기술자를 그린 건 이중인격적”이라고 비난했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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