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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구의 바둑 이야기] 바둑계 '불운의 챔피언' 이었던 아들… '아들의 이름으로' 대회 여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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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구의 바둑 이야기] 바둑계 '불운의 챔피언' 이었던 아들… '아들의 이름으로' 대회 여는 아버지

입력
2013.08.23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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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여년 국내외 바둑 승부의 현장을 누벼온 칼럼니스트 이광구(58)씨의 '바둑 이야기'를 24일부터 부정기로 연재합니다. 월간 바둑 편집장, 바둑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이씨의 칼럼은 환희와 좌절, 냉정과 열정이 교차하는 바둑동네의 희로애락과 뒷얘기를 담아낼 것입니다.

"한국에서 영영 잊혀질 줄만 알았던 샘이의 이름을 내건 대회를 내 손으로 직접 진행하는 날이 오다니."

'불운의 챔피언' 홍맑은샘과 바둑대회 디자이너 홍시범 대표. 홍시범(56)씨는 바둑대회장 세팅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 '클럽 A7'의 대표다. 일반에겐 매우 생소한 업종인데 조금 고상하게 표현하자면 '바둑대회 디자이너'라고나 할까, 대회장에 바둑판 세트와 테이블, 의자를 배치하고 각종 플래카드와 홍보물 등을 제작, 설치하는 일이다.

지난 15일 경기 송추에서 자그마한 어린이 바둑대회가 열렸다. '제1회 맑은샘배 어린이 최강전'이다. 2000년대 초반 국내 아마추어 최강자로 군림했으나 수 차례 입단에 실패해 '불운의 챔피언'이라 불렸고,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간사이(關西)기원에서 기어이 프로의 꿈을 이뤄 현재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홍맑은샘(32) 2단이 "어려웠던 어린 시절에 용기를 북돋아 주셨던 많은 분들께 늦게나마 감사드리는 뜻에서, 또 바둑의 꿈을 꾸는 고국의 후배들을 격려하고 싶어서" 만든 대회다.

맑은샘의 아버지가 홍시범 대표다. 홍 대표는 요즘 많이 이야기되는 이른바 대안교육의 원조격이다. 우선 '맑은샘'이라는 이름부터 뭔가 범상치 않은 느낌이다. 맑은샘의 네 살 아래 여동생은 '맑은비'. 어릴 때 둘 다 공부에는 별로 흥미가 없는 것 같았다. 학력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궁리하다 맑은샘에게는 바둑을 가르쳐 봤다. 맑은샘은 바둑을 무척 좋아했고 빨리 늘었다. 만화를 좋아하고 그림에 재능이 있는 것 같은 맑은비에게는 애니메이션을 권했다. 굳이 학교를 보낼 이유가 없었다. 대신 좋아하는 것만을 시키면서 책을 엄청나게 읽혔고, 아이들은 엄청나게 읽었다. 남매의 교양과 상식과 예의를 접해 본 사람들은 누구나 칭찬과 감탄을 아끼지 않으며, 남매가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아들이 출전하는 바둑대회에 으레 동행했다. 대회장의 배치나 진행방식 같은 게 항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맑은샘처럼 샘솟았다. 맑은비가 내리는, 그런 멋진 대회장을 꾸미고 싶었다. 아들이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며 일본으로 건너간 게 2004년, 이듬해 아버지는 '클럽 A7'을 만들었다. 'A7'은 '아마추어 7단'이라는 뜻이다. 아마추어는 7단이 최고다. 맑은샘이 일본에 건너가기 전에 한국에서 아마 7단이었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 갔다고는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어찌 한 조각 아쉬움이 없었으랴. 'A7'은 아버지가 아들의 한을 대신 가슴에 새긴 우정의 엠블럼이었다.

"대회장의 품위와 격조를 살리고 어떻게 하면 선수들과 관중과 후원자, 모두를 기분 좋게 해 줄 수 있을지를 연구했습니다. 그게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닌데, 그 동안에는 그런 개념 자체가 없었던 겁니다." 홍 대표의 말이다.

'클럽A7'이 하는 일을 바둑인들이 모두들 좋아하고, '클럽A7'의 아이디어로 대회장이 빛나게 되자 '클럽A7'도 무척 바빠졌다. 요즘은 일 년 열두 달, 매주말이면 전국 어디에선가 반드시 바둑대회가 열린다. 이 가운데 어느 정도 명성이 있는 대회에 가 보면, 대도시 두메산골 가릴 것 없이 으레 '클럽A7'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대회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바둑대회 한 번 치르려면 대회장에 바둑판을 200여개는 날라야 한다. 거기다 알 통, 테이블, 의자까지…. 중노동이다. 그다지 큰 벌이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회가 워낙 많다 보니 그럭저럭 양으로 커버하고 있다.

홍 대표는 별명이 '홍 감독'이다. 무슨 뜻인가 궁금했는데 이날도 대회 진행과 각종 시설물 설치 등을 열정적으로 총지휘하는 모습을 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저도, 샘이도 그동안 많은 분들께 너무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한국 바둑계서 영영 잊혀질 줄만 알았던 샘이의 이름 석 자를 내건 대회를 제 손으로 진행하는 날이 오다니 정말 감개무량합니다." 이날 아들은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대회의 주역을 맡았고, 아버지는 찢어진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무대 뒤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이광구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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