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생 황모(23)씨는 지난달 17일부터 악몽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날 황씨는 지난해 7월부터 세 들어 살던 서울 신림동 원룸 건물이 통째로 경매에 넘어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황망 중에 "15세대 중 전세는 당신까지 3곳"이란 계약 당시 공인중개사의 말이 떠올랐고, 보증금 5,500만원 중 일부는 받으리란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한낱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설마 하고 알아보니 15세대 전부가 전세라 늦게 들어온 황씨의 채권 순위는 거의 뒤였고, 설상가상 은행에 담보로 잡힌 건물은 이자까지 연체돼 한 푼도 못 건질 상태였던 것이다. 그는 "공인중개사 말만 믿고 계약할 때 세입자들을 일일이 방문해 확인해보지 못한 게 한"이라고 울먹였다.
피해자는 황씨뿐이 아니다. 22일 본보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A씨 가족이 운영하던 신림동 원룸 건물 6채가 6월 말부터 줄줄이 경매 절차에 들어가면서, 149세대가 거리로 쫓겨날 처지에 놓였다. 묶여있는 전세보증금만 64억원에 달한다. 일부 건물은 관리비가 수개월째 연체돼 정화조가 넘쳤고, 도시가스가 끊겼다.
세입자들은 한결같이 A씨 가족과 관리인(공인중개사)의 '엉터리 계약' 탓에 피해를 입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등기부등본 미확인이나 전입신고 지연 등 세입자 잘못도 있지만, 집주인이 임차인을 속이거나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아 피해가 커졌다는 주장이다.
A씨 소유 다른 원룸의 세입자 이모(32)씨는 "집주인의 대리인이 35세대 중 5세대만 전세라고 했지만 모두가 전세였다"고 하소연했다. 이 건물 세입자 다수를 중개한 공인중개사는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집주인 말을 믿는 수밖에 없다"고 해명했다.
관련 법도 현재로선 무용지물이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임대차계약 전에 주민센터에 해당 주택에 선(先)순위 임차인이 있는지, 보증금과 월세는 얼마인지 등의 정보를 요청할 수 있도록 올해 임대차보호법이 개정됐지만, 새 제도는 실무절차 탓에 내년부터 시행된다.
A씨 소유 또 다른 건물 세입자 박모(29)씨는 "해당 건물에 강제경매를 신청한 사람은 등기부등본엔 없는 채권자"라면서 "확인할 수 없는 채권 때문에 집이 경매에 넘어갔다" 고 호소했다. 계약 이후 집주인이 건물을 담보로 세워도 임차인이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을 구제할 방법도 거의 없다. 해당 세입자들의 전세보증금은 3,000만원에서 1억1,000만원에 이르는데, 주택임대차보호법이 우선 보장하는 최우선변제금액은 2,500만원에 불과하다. 그마저 보증금이 7,500만원이 넘으면 최우선변제 대상에서 제외된다. 또 전체 세입자 몫의 최우선변제 금액이 경매 낙찰가의 50%를 넘지 못하는 탓에, 세입자가 많으면 최우선변제 금액마저 모두 받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장흥배 참여연대 간사는 "경매가 시작되면 세입자들은 배당신청을 하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손해배상소송은 공인중개사의 과실을 증명하기가 어렵고, 전세금반환소송은 집주인이 파산하거나 재산을 숨기면 이겨도 돈을 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 주택경기 침체 탓에 경매로 넘어가는 집이 늘어나면서 세입자들의 피해도 증가하고 있다. 경매에서 보증금을 잃은 임차인 수는 수도권에서만 2010년 5,422명에서 2012년 7,819명으로 훌쩍 뛰었다. 올해도 7월까지 임차인 5,738명이 보증금을 잃었다.
결국 치솟는 가격에 품귀현상마저 빚고 있는 최근 전세대란에서 세입자들이 비슷한 피해를 당하지 않으려면 예방 밖엔 길이 없다. 법무법인 대광의 박관우 변호사는 "전입신고하고 확정일자를 받는 건 기본이고, 주택이 아니라면 전세권 설정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참여연대 김남주 변호사는 "너무 낮은 최우선변제 기준(7,500만원)만이라도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달 전국 주택의 평균 전세가격은 1억4,558만원이었다.
김민호기자 kimon87@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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