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의혹 사건에 대한 경찰 수사를 은폐ㆍ조작한 혐의로 기소된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의 첫 공판이 23일 열린다. 검찰은 당시 수사 관계자들의 광범위한 진술 등을 근거로 유죄를 확신하고 있지만, 김 전 청장 측은 공소사실을 모두 부인하며 무죄를 주장하고 있어 치열한 법정 공방이 펼쳐질 전망이다.
김 전 청장의 혐의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부당한 지시를 내렸다는 취지의 형법상 직권남용과 수사결과 발표를 조작해 공정한 선거를 방해했다는 공직선거법 위반, 두 가지다. 재판은 당시 수사라인 관계자들의 법정 진술을 중심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쟁점은 수사 초기 압수수색을 하려던 서울 수서경찰서 수사팀의 의지를 꺾었는지 여부다. 검찰은 지난해 12월 12일 민주당이 고발한 국정원 직원 김모씨의 댓글 조작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면 압수수색이 필요했는데도 김 전 청장이 부당한 압력을 넣어 압수수색 영장 신청 자체를 막았다고 판단했다. 당시 수사팀이 "증명 자료가 불충분해 영장을 신청할 수 없었다"고 밝혔지만, 검찰은 압수수색이 필요했던 정황을 제시하며 관련자들의 법정 진술을 끌어 낼 계획이다. 김 전 청장 측은 "검경 수사권 논란을 의식해 신중을 기했고, 문제가 될 소지가 있어 침착하게 수사를 진행했을 뿐"이라며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국정원 직원들의 댓글 조작 등에 사용된 아이디를 경찰이 파악했는데도 이를 축소해 전달하도록 지시했는지 여부도 쟁점이다. 검찰은 12월 12, 13일 서울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 디지털 증거분석관 10명이 국정원 직원 김씨 등이 40여개의 아이디와 닉네임을 사용해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 수만 번 접속한 기록을 발견했지만, 김 전 청장의 지시로 아이디와 닉네임 발견 경위와 인터넷 접속기록, 검색 기록 등을 축소해 수사팀에 넘긴 것으로 보고 있다. 검찰은 김 전 청장이 같은 달 15일 서울경찰청 수사부장을 통해 관련 내용을 보고받았다는 진술과 보고라인에 있었던 증거분석팀장의 수기보고서를 확보해 혐의 입증에 무리가 없을 것으로 자신한다. 이에 대해 김 전 청장 측은 "컴퓨터와 관련된 지식이 없어 구체적으로 지시를 할 수도 없었다"고 전면 부인하고 있다.
디지털 분석자료를 수서경찰서에 넘기지 말라고 지시했는지, 컴퓨터에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펜으로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했는지 여부도 유ㆍ무죄 판단의 핵심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같은 달 15일 오전 김 전 청장이 서울경찰청 수사부장, 수사과장, 수사2계장에게 분석자료를 수사팀에 넘기지 말라고 지시한 것은 물론, 16일 중간수사결과 발표 이후에도 같은 지시를 했다는 증거를 확보했다고 주장한다. 특히 검찰은 김 전 청장이 보고 및 지시 과정이 문제가 될 것으로 예상해 펜으로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하는 등 직권을 남용한 것으로 파악했다. 하지만 김 전 청장 측은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으며 보고서는 수사 내용이 유출될 것을 우려해 수기로 작성했을 뿐"이라고 맞서고 있다.
가장 치열한 공방이 예상되는 핵심 쟁점은 중간수사결과 발표 내용의 허위성 여부. 검찰은 김 전 청장이 수사팀에 디지털 증거자료를 넘기지 말도록 지시한 상황에서 국정원 직원의 무혐의를 강조한 거짓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해 공정한 선거를 방해했다고 판단했다. 김 전 청장 측은 "중간수사결과 발표는 실무자 선에서 이뤄졌다"고 반박하고 있다.
김 전 청장이 모든 사실관계를 부인함에 따라 재판 일정은 자연히 지연될 것으로 예상된다. 재판부는 검찰과 변호인 측에 23일 첫 공판에서 주장의 요지를 프리젠테이션 형식으로 정리해 밝히라고 지시했다. 이후 재판부는 당시 수서경찰서장과 수사과장 등에 대한 증인심문을 통해 공소사실을 하나하나 파악할 계획이다. 법원 관계자는 "법정 진술을 통해 유무죄가 갈릴 것으로 보이는 만큼 양측에 공평한 변론 기회를 부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재호기자 next8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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