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가 매서웠던 2011년 1월30일, 해적들이 한국 땅을 밟았다. 인도양 북부에서 삼호주얼리호를 납치해 우리 선원들의 몸값을 요구하다 생포된 소말리아 해적 5명이다. 해양경찰은 남해지방해양경찰청에 특별수사본부를 꾸리고 우리 역사상 최초로 해적 수사를 펼쳤다. 특히 석해균 선장 총격에 대해 집중 수사를 벌였고, 재판부는 해적 5명에게 무기징역과 징역 12~15년을 각각 선고했다. 사법사상 초유로 해적사건을 수사하게 된 해경은 그런 경험과 수사과정에서 나타난 현행 형사법과의 괴리,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해 '해적처리특별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날로 흉포화하는 외국어선의 불법조업을 단속하는 것도 해경의 주요임무 중 하나다. 폭력적으로 저항하는 불법 중국어선에 맞서 해경은 거친 파도 속에서 우리의 어족자원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릎 쓴 채 사투를 벌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2011년 12월12일에는 중국어선 단속에 나섰던 이청호 경사가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런 활약을 펼치고 있는 해경이 올해로 창설 60주년을 맞았다. 하지만 반세기 이상 국민과 해상 동반자 관계를 유지해 온 해경이 언제 탄생했고,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아는 이들은 드물다.
오래전 옛날에도 해경은 있었다.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태조이후 여진족의 침략이 지속적으로 이어지자 주현군(지방군대)등은 해안의 각 요지에 도부서(都府署)를 설치하고 무장 함정을 건조해 방어에 나섰다. 이때에도 문제의 해적들은 존재했다. 당시 서해와 남해상에는 송나라 상선의 왕래가 성황을 이뤘는데, 송나라ㆍ왜 등의 해적선이 해상에서 활개를 쳤다. 고려 군사들은 백성들을 위해 해적을 제압하고 무기와 보물들을 되찾았다. 당시 상황을 고려해보면 해상에서 활약했던 이 군사들의 역할이 지금 해경의 주요업무 중 하나인 '해양범죄 예방ㆍ단속'과 부합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완벽한 틀을 갖추진 않았지만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조, 대한제국까지 명맥을 유지하면서 해양치안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희망과 행복의 바다에서 국민과 함께하는 현재 해경의 발판을 마련했다.
해경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서 '해양경찰'이라는 이름으로 국민의 안전과 해양자원을 지키기 시작한 것은 1953년 12월이다. 이때 내무부 치안국 산하에 '해양경찰대'가 편성됐다.
'해양경찰'이라는 단독명칭과 업무가 생긴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 연안에서 남획을 일삼던 일본어선 때문이었다. 45년 광복이후 우리나라는 일본어선의 어구를 규제한다는 각서를 일본에 전달하고, 어족자원 남획금지와 군사상 통제를 위해 '맥아더라인'을 설치했지만, 일본 수산업계는 월선 조업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수산자원을 빼앗긴 우리국민의 분노는 날로 고조됐고,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나라 해상을 침범하는 일본어선을 모조리 나포할 것을 지시하면서 한ㆍ일 간의 갈등은 심화했다. 53년 남북은 휴전상태에 들어갔으나, 일본어선은 주권선 침범을 멈추지 않았다. 해양경비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이유다.
해경은 그동안 수많은 시련과 고통을 거쳐 열정, 희생, 봉사를 핵심으로 하는 조직문화를 갖추게 됐으나 여전히 많은 숙제들이 산적해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한반도를 둘러싼 해양정세는 긴박한 상황이다. 동북아 각국의 해양영토 확장 경쟁은 주변국과의 해양 분쟁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으며, 내부적으로는 잇따른 대형 해상인명사고로 인해 국민안전 확보에도 비상등이 커진 상태다.
세계 일류 해경이 되기 위한 길은 험난하지만 목표를 '국민안전 실현'에 둔다면 달성은 어렵지 않다고 본다. 그 첫걸음은 독도 이어도 등 우리의 해양영토를 수호하고 불법조업 같은 국익을 저해하는 행위에 단호하게 대응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국민치안은 육상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어선과 상선에 대한 보호활동을 강화해 분쟁의 단초가 될 수 있는 요인을 사전에 제거하는 것 역시 국민에게 '안전한 바다'를 제공하는 소중한 작업임에 틀림없다.
김석균 해양경찰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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